그들은 경부고속도로건설을 왜 반대했을까 

 

 

우리나라의 산업근대화의 시점을 잡으라면 아마도 경부고속도로개통을 그시점으로 보는 사람들이 적지않을 것이다. 1970년 7월7일 개통된 경부고속도로는 세계역사상 가장싸게 그리고 가장 빠르게 건설되었다. 429km를 건설하는데 429억원이 들어가서 당시 일본 동명고속도로의 8분의 1수준이었다. 거기다가 1968년 12월1일이 공식착공일이었으니 19개월만에 완공한 셈이다. 이러다보니 부실공사가 되어 1990년 말까지 보수비만 1,527억원으로 건설비의 4배가 들어갔다.

 

하지만 이런 논란에도 불구하고 고속도로 자체는 허술했지만 ‘다이나믹 코리아’의 상징이었고 경제성장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측면은 부정할 수는 없다. 제대로 했다면 12년은 걸렸을 거라고 한다. 더군다나 이사업은 격렬한 정치적반대를 무릅쓰고 강력히 추진한 박정희 리더쉽의 대표적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경부고속도로는 박정희 신화의 대표적 상징이다. 박정희독재에 대한 향수는 그런 결단이 우리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기억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기억이든 사실과 진실이 다를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문제도 마찬가지이다. 진실은 이렇다. 우선 반대가 많지 않았다. 고속도로건설은 1967년 대통령선거에서 박정희의 대선공약으로 발표되었고 직후 여론조사 결과 68%무조건 찬성, 27%가 조건부찬성, 반대는 5%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실제 고속도로 건설당시에 일반국민들은 애국심으로 용지대금을 낮출 정도였다. 582만 7,000평의 용지대금으로 지급된 총액이 18억 7,667만 3,000만원으로 평당 236원에 매수했다. 당시 담배한갑에 40원(파고다), 쌀한가마에 4,350원하던 때였다.

 

찬성여론이 다수였다 하더라도,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무엇이었을까? 가장 큰 이유는 지역균형발전이었다. 세계은행의 자매기구인 국제개발협회가 “경부고속도로같은 남북종단도로보다는 횡단도로가 더 시급하다”라며 차관지원에 난색을 표한 것도 바로 그 문제였다.


따라서 호남을 중심으로 편향에 대한 비판이 있었고, 6대 대통령선거때 박정희후보의 호남선복선화공약의 이행이라는 문제가 있었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와 같이 착공된 호남선복선화 공사는 36년이걸린 후 2004년에야 완공되었다. 어느교수의 논문에 의하면 정권교체전까지 영남과 호남의 예산투자액수가 10대1이었다고 한다.

 




결국 지역균형발전을 위한 재원배분 논쟁이었던 셈이다. 고속도로가 경제성장을 가져온다는 것은 동의하지만 그 시기와 방식에 대한 논란이었다. 당시 반대진영의 논객은 건설위원회 소속국회의원이었던 김대중이 돋보였다. 당시 그는 호남의 이익만 옹호하지 않았다. 당시 그는 IBRD(국제부흥개발은행)의 보고서를 근거로 서울-부산간에는 철도망과 국도·지방도가 잘 갖추어져 있으므로 오히려 서울-강릉간 고속도로를 가장먼저 건설해야한다고 주장했다.강원도에는 지하자원과 관광자원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아예철도조차 없다는 이유였다. 아마 이 주장대로 되었다면 해안은 교통시설이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으므로 지금의 현실과는 다른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극히 일부이기는 하지만 급속한 성장에 대한 우려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시대를 앞서 고민한 흔적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때 반대에 앞장섰던 김영삼의원이 훗날 대통령이 되어서는 경부고속도로가 4차선밖에 안돼어서 문제가 많다며 박정희 정권을 비난한 것이다. 그분의 스타일이야 익히 아는 바이기에 놀라지는 않지만 마치 개그를 보는 것 같다.

 

그러면 박정희대통령이 급속히 추진했던 진짜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1971년 대통령선거때문이었다. 대통령선거 전에 공사를 완공시켜기 위해 무리한 공사를 진행시킨 것이다. 또한 경제적 고려도 있었다. 경제개발의 본격화로 인한 철도수송의 과포화와 울산정유공장건설이후 공급과잉상태에 놓인 아스팔트를 처리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최근 이명박대통령이 국민과의 대화 자리에서 경부고속도로도 반대가 많았지만 결국 지금은 지지를 받지 않았느냐며 4대강사업 추진을 강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4대강사업은 다수가 반대하고 그 결과도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고, 그 결과가 불을보듯 뻔한 사업이다.

 

이와 비슷한 사례로 청계천이 있다. 청계천도 반대가 많았지만 강력히 추진한 결과 성공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둘다 잘못된 기억이다. 청계천도 환경단체들은 물론 진보신문이라 그들이 이야기하는 한겨레신문까지 지지하였다. 문제제기는 추진내용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명박 대통령이 한겨레신문에 몇 안되는 글 중 하나를 기고하기까지 하였다.

 

문제는 잘못된 기억 때문에 지금 욕을 먹어도 훗날에는 찬양받을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역사에서는 영원히 욕을 먹는 일이 훨씬많다는 사실을 그분은 모르는 것 같다. 더구나 이런 기억력으로는 나중에 자신은 사실 반대하려고 했다는 주장을 하지는 않을까. 김영삼대통령처럼 개그를 시도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사고가 너무크다. 우리의 고통도 너무도 막대하다. ‘잘못된 기억’은 ‘잘못된 미래’가 될수도 있다.

 

 

* 이 글은 시민의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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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부흥-세종이 만들었다 

 

 

600년전 조선의 출산휴가

우리나라는 법으로 직장에 다니는 임산부에게는 출산휴가를 주도록 되어 있다. 물론 잘 지켜지지는 않는다. 여성에 대한 편견과 출산을 개인의 문제로 보는 시각, 여하튼 복지를 적대시하는 이념적 성향까지 다양한 장애물들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600년전 조선에서도 출산휴가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그 주인공은 세종이다. 1426년, 세종8년에, 관청의 계집종이 아이를 낳으면 백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이것을 법에 명시하도록 형조에 지시했다. 이때 세종의 나이 29세이니 이많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군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로부터 3년 후에는 산전휴가 30일을 더 주도록 하고 있다. 그러니 130일의 출산휴가다.

 

내용을 보면 “옛날에는 노비가 아이를 낳으면 반드시 출산하고 나서 7일간 쉬게 하였다. 아이를 내버려두고 일하면 어린아이에게 해가 될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찍이 백일의 휴가를 주었다. 그러나 출산시기에 가까워 일하다 몸이 지치면 집에 가기 전에 아이를 낳는 경우가 있어 산모와 아이의 건강이 걱정된다. 법으로 출산 전 1개월을 쉬게 하라. 속이려 들더라도 1개월이야 넘겠는가”라고 되어 있다. 배려와 혜안이 놀랍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남편들에게도 출산휴가를 주었다는 것이다. 4년 뒤인 1434년에 “여종이 아이를 가졌거나 산후 백일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는 일을 시키지 말고 휴가를 주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남편에게는 전혀 휴가를 주지 않고 일을 하게 하여 산모를 돌볼 수 없게 되니, 이는 부부가 서로 돕는 뜻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이따금 목숨을 잃는 일도 있어 진실로 가엾다 하겠다. 이제부터 사역인의 남편도 산후 30일간 쉬게 하라”는 명을 내린다. 이 내용은 조선의 기본법인 경국대전에도 규정된다.

 

출산휴가는 세종의 의지

남편에게 육아휴가를 주는 것은 선진국도 최근에야 실시한 것으로서 세종대왕의 이런 조치는 아마도 세계 최초일 것이다. 그나마 대부분의 나라는 대부분은 태아의 건강을 생각하는 정도였다. 세계에서 제일 오래된 성문법인 함무라비 법전(기원전 1700년대)에는 태아를 유산시키는 아내를 처벌하고, 산모의 생명이 위태롭다고 해도 아이 낳는 일을 포기할 수 없도록 규정했던 기록이 있다. 스파르타의 경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그나마 이것도 드문 사례일 뿐이다.

 

우리 노동법에는 산전, 산후 모두 합해 90일의 출산휴가를 보장하고 있다. 또한 정부가 급여의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를 외면하고 있어서 이것을 이용하는 사람도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공공기업이나 공무원이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도 공노비들이 이 혜택을 우선적으로 받았기 때문에 전통을 지키려는 차원(?)이 아닐까하는 묘한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런데 세종이 이런 정책을 편 것은 단지 어질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다. 국가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다. 인구가 늘어야 국가의 부가 늘어나는 것은 고금의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지배층들도 이것을 칭송했다.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는 현재의 기득권세력과는 달랐다. 이것이 조선 초기에 국가가 엄청나게 발전했던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든든한 재정이 원인-공법

이러한 세종의 복지가 가능했던 이유는 재정이 튼튼했기 때문이다. 튼튼한 재정은 공평한 조세제도 덕분이다. 공법이라 불리는 세종의 조세제도는 중국의 하나라에서 시행했다는 전설의 조세인데 일정한 땅을 농민에게 나누어주고, 그중 10분의 1의 땅에서 나온 수확을 세금으로 바치게 하는 고정비율의 세금이다.

 

이전에는 고정액을 바치는 제도였다. 고정액을 바치면 조세가 상향평준화 된다는 문제가 있다. 관료들은 실적 때문에 더 많이 거두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공평하고 정밀한 세금제도를 시행한 것이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세계역사에서 보기 드문 훌륭한 제도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을 이런 정책을 결정하는데 여론조사를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12년인 1430년 공법 시안에 대해 찬반을 묻는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무려 172,468명의 의견을 묻는 최초의 여론조사가 있었다. 이때 조선인구가 대략 6백만으로 보는데 절반이 노비인 것을 감안하면 3가구 중 1곳은 조사에 응한 것이다.

 

결과는 찬성 98,657명, 반대 74,149명으로 찬성이 57%였다. 조사기간은 무려 5개월이었고 조사방법은 1대1면접일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결과는 상대적으로 땅이 비옥한 영호남은 찬성이 반대를 압도하였고 척박한 서북지역은 정반대였다. 또한 3품이하 하급관리들은 찬성이 많고 고위관리들은 반대의견이 많았다. 지역별, 계층별로 이해 관계에 따라 의견이 갈린 것이다. 공법은 반대 의견을 계속 수렴해서 제안된지 17년만에 연분 9등법 등으로 절충되어 실시된다. 그리고 우리세법의 기본이 되어서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당시의 재정은 세종때는 1년에 4백만석의 생산을 기록하고 1년 비축미만 125만석이 될 정도였다. 선조이후에는 정부의 1년 세입이 대부분의 기간동안 쌀, 콩, 조를 통틀어 23∼24만 석에서 50만석을 넘지 않았던 것과 비교하면 대단한 국가재정상태였다. 여진족부대를 운영하고, 대마도를 정벌하며, 한글을 연구하기 위해 인도와 위구르까지 연구진을 파견하는 능력은 이런 국가재정의 힘이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조선의 부흥은 세종시대에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그 성군은 훌륭한 정책에서 나왔고, 그 정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를 이끌어냈던 자세에서 나오는 것이다. 갑갑한 지금의 현실을 생각해보면 12년전으로 후퇴한 것이 아니라 600년전으로 후퇴한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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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의 저출산


고대 도시국가 스파르타가 몰락한 가장 큰 원인은 인구감소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인구감소의 원인으로 토지 체계를 들었다. 스파르타는 한때 보병과 기병 3만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었지만 말기에는 1천명도 감당하지 못했다.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쇠망한 것이다.

 

스파르타도 처음에는 인력난 때문에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그것은 강국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절정기부터는 문호가 닫힌다. 거기다 더하여 부의 집중문제가 있었다. 인구증가를 위한 법은 있었다. 당시 자녀 셋을 두면 노동에서 면제되고, 넷을 두면 세금까지 면제되었다. 하지만 경제문제라는 본질을 회피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가 늘면서 토지가 분할되자 상당수는 빈곤해졌다. 그래서 부유층은 재산유지를 위해 출산을 의도적으로 회피했다. 그래서 경제력이 집중되었다. 때문에 토지를 소유한 가문이 3세기 즈음에는 토지를 소유한 가문은 100여 개에 불과하게 된다. 물론 외국인을 유입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소유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경제문제가 가져온 인구감소가 스파르타를 몰락하게 만든 것이다.

 

스파르타에서는 새로운 사람들이 부유층으로 집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스파르타는 이런 배타적인 정책 때문에 스스로 절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긴밀한 결합으로 자신의 계급을 유지하려는 정책과 일종의 산아제한, 가족규모제한, 독신주의 횡횡 등도 인구가 감소하는 원인이었다. 이에 반해 영국 귀족계급은 가문이 끊기고 작위가 단절되어 귀족의 수가 줄어들자 새로운 작위를 수여함으로써 그 세력을 유지했다.

 

 

 

로마시대에서도 인구감소 문제가 심각했다. 그라쿠스 형제가 10남매였듯이 기원전 2세기에는 다산多産이 일반적이었지만 기원전 1세기경에는 출산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투스는 간통법과 혼인법을 제정해서 자유연애를 범죄로 규정하고 이혼했거나 결혼하지 않은 독신여성에게는 상속을 금지하는 등 재산 소유를 제한했다. 비슷한 상황의 남자는 공직에 진출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이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효는 없었다. 자유민이 몰락한 것이다. 그럼에도 로마는 스파르타와 달랐다. 아프리카인이 황제가 될 정도로 개방적인 사회였기 때문이다.

 

우리도 인구감소를 많이 우려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고조顧助(보살피며 도와줌)라는 정책을 시행했는데, 결혼하지 못한 처녀를 조사해 그 연유를 기록한 후 혼인보조금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능력이 있음에도 시집을 보내지 않으면 국문을 하기도 했다.

 

부자들은 재산 감소를 우려해서, 가난한 사람들은 부양 능력이 없어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부유해져서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한 면만 본 것이다. 대부분은 양육 같은 경제 문제가 핵심이다. 그래서 근대 이전의 국가에서는 출산장려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최근 출산감소가 국가적인 문제로 등장했다. 한때는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산아 제한을 했다고 호들갑이더니 이제는 온통 인구감소 걱정들이다. 노 대통령은 선거 당시 “아이는 제가 키워주겠다”고 했다. 출산장려의 핵심은 육아문제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일부에서는 저출산 현상을 편한 것만을 찾는 풍조로 돌리고 있다.

 

부유해지면 인구가 감소한다는 것은 일면을 본 이야기이다. 사회불안정도 인구감소의 원인이다. 최근 러시아는 급격한 인구감소를 보이고 있는데 그 결정적 요인은 경제불안 의료체계의 붕괴 등 사회불안이라고 한다. 공동체의 활력과 인구증가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인구감소로 인한 위기가 닥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폐쇄성도 한 이유가 될 수 있다. 흑사병과 같은 커다란 재앙이 아니고서는 아무리 인구가 줄었다 한들 전체가 줄어드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우리는 폐쇄적인 단일민족 혈통주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마저도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외국인노동자을 대하는 태도는 인권의 문제뿐 아니라 국가의 존망과도 연결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다른 시각도 있다. 저출산이 오히려 우리사회의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꿀수 있다는 것이다. 인구가 줄어 보다 인간적인 사회가 될수 있다는 것이다. ‘자발적 인류멸종운동’(VHEM)을 벌이는 이들도있다.

 

이번 2010년 예산안을 보면, 예산의 변화가 눈에 띄지 않는다. 저출산 대책은 말뿐이었음을 알수 있다. 혹시 이 정부는 자발적 민족멸종운동의 이념을 지지하는 것은 아닐까? 설마 공동체의 미래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닐테니 말이다.

 

 

이글은 시민의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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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포퓰리즘과 나쁜 포률리즘

 

 

미국에서 시작된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를 가리키는데, 다른 말로 대중주의라고 하기도 한다. 요컨대 일반 대중을 정치의 전면에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는 방식을 말한다고 할 수 있겠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퓰리스트 정당인 인민당(People's Party)에 있다. 인민당은 당시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과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창당됐다. 당시 소외받던 흑인과 백인 농부를 지지 기반으로 한 이 당은, 1892년 대통령선거에서 1백만 표를 얻어 몇몇 주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누르고 승리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문제에 대해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민주당이 개혁하면서 점차 세력이 약해졌다.

보통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 엘리트나 적대 세력이 저항하면 국민에 직접 호소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혁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정치적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공고히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을 경멸하는 의미로 퓰리스트라고 부른다. 포퓰리스트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대중들이 좋아하고 겉모양만 번지르르한 개혁을 내세우며, 그래서 인기에 영합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을 내세워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포퓰리스트의 대표적인 인물로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을 든다. 페론은 지금도 끝없이 추락하는 아르헨티나 경제를 일컫는 아르헨티나병을 만든 장본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1940년대에 세계 5대 부국에 들던 아르헨티나가 1945년 페론 대통령이 집권하고 포퓰리즘식 퍼붓기 분배정책을 펴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복지 지출을 마구 늘린 반면 소득세는 내렸고, 그 결과 재정적자가 쌓여갔다. 몇몇 정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노조의 총파업 등 민중의 저항을 받아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파탄에 이르게 됐다는 주장이다. 이런 까닭에 우리 나라에는 아르헨티나병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억울한 개혁적 포퓰리스트 페론

그런데 이런 시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아르헨티나 문제 뒤에는 독특한 역사적 배경이 자리잡고 있다. 아르헨티나는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한 백인국가다. 하지만 사회구조는 다른 혼혈국가와 차이가 없다. 지가상승과 농지확장으로 생겨난 부를 지주과두제 세력이 대부분 가져버렸고, 그 돈은 런던의 금융가에 고스란히 건네졌다. 이 과두제 세력이 문제의 핵심이다.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한데 땅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고, 대다수 국민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개혁을 내세운 페론이 각광을 받았다. 전국 토지의 3분의 1을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했다. 아르헨티나에 비로소 중산층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페론정권 시절이 그나마 가장 안정된 시기가 됐다. 외채도 별로 없었다. 그 결과 소비가 촉진되고, 아르헨티나는 세계 5위의 경제력을 구가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농업국이던 아르헨티나를 공업국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 시작됐다. 이런 결과 페론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최근 백 년간 아르헨티나에서 임기를 모두 마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하나가 됐다.

페론정권의 문제는 경제보다는 정치에 있다. 페론주의는 특정한 이념이 아니다. 그래서 언론에서 즐겨 쓰는 포퓰리즘이나 페론주의는 과장되고 왜곡된 것이다. 페론에게 잘못이 있다면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사회에 자리잡은 뿌리 깊은 적대감을 자신의 상징으로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결국 해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의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군부정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페론을 몰아내고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의 외국종속을 심화시켰다. 외채만 해도 페론정권 때는 96억 달러에 그쳤지만, 끊임없이 늘어나 1500억 달러에 이르게 된다.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도로건설권, 석유채굴권은 물론 주민등록증 발급업무까지 외국기업에 넘길 정도로 과격한 국영기업 매각을 추진했다. 하지만 시장개방, 내핍정책과 지나친 이자 부담, 소득불균형 심화, 채무증가, 그리고 IMF 구조조정의 악순환이 이어졌다.

 

우리나라에도 포퓰리즘 한번 있어봤으면

모든 정치인은 포퓰리스트라는 말이 있다. 정치를 정의하는 현실적인 명제다. 지지를 받지 않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자원이 풍부하다. 그런데도 사회 내부의 갈등은 심각했고,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포퓰리즘이 문제가 아니라 노블리스오블리제가 문제인 것이다. 전체 인구의 절반인 1800만 명이 월소득 245달러를 밑도는 빈민층이다. 페론 시대에 형성된 중산층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페론을 그리워하는 페론현상이 생겨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주요 언론들은 반복되는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원인을 페론주의에서 찾고 있다. ‘경제적 포퓰리즘과 노동계급의 무리한 요구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아르헨타의 계속되는 경제위기는 경제개방과, IMF의 권고를 너무 충실히 따른 결과다. 지하의 페론이 억울해 할 일이다.

우리 보수세력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진실을 왜곡한 것이다. 정책이 인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옳느냐 그르냐 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옳은 정책을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대중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이다. 더구나 그 엘리트들은 기득권까지 가지고 있다.

포퓰리즘은 인기에 영합한다는 부정적인 의미말고도 소수의 지배집단이 통치하는 엘리트주의와 대립되는 민중주의라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동전의 양면처럼 두 가지 측면이 있는 것이다.

보수세력은 노무현 정권을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했다. 하지만 오히려 노무현 대통령은 너무나 반포퓰리즘이어서 문제 아니었을까? 진짜 문제가 있다면 대립을 정치공학적으로 이용한 측면이다.

문제는 지금의 정권도 반포퓰리즘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다. 포퓰

 

리즘과 마찬가지로 반포퓰리즘에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는 지난 2년이었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어째 포퓰리즘 한번 해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이 글은 시민의 신문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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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속의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를 가리킨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퓰리스트 정당인 인민당People's Party에 있다. 인민당은 당시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과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창당됐다. 당시 소외받던 흑인과 백인 농부를 지지 기반으로 한 이 당은, 1892년 대통령선거에서 1백만 표를 얻어 몇몇 주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누르고 승리하기도 했다.

 

보통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 엘리트나 적대 세력이 저항하면 국민에 직접 호소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혁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정치적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공고히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을 경멸하는 의미로 ‘포퓰리스트’라고 부른다. 포퓰리스트들은 인기에 영합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을 내세워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대다수 언론에서는 포퓰리스트의 대표적인 인물로 으레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을 든다. 페론은 심각한 아르헨티나 경제를 일컫는 ‘아르헨티나병’을 만든 장본인으로 불리운다. 1940년대에 세계 5대 부국에 들던 아르헨티나가 1945년 페론 대통령이 집권하고 포퓰리즘식 퍼붓기 분배정책을 펴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복지 지출을 마구 늘린 반면 소득세는 내렸고, 그 결과 재정적자가 쌓여갔다. 몇몇 정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노조의 총파업 등 민중의 저항을 받아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파탄에 이르게 됐고, 이런 까닭에 우리 주변에는 ‘아르헨티나병’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진실은 다르다. 지가상승과 농지확장으로 생겨난 부를 지주세력이 대부분 가져버렸고, 그 돈은 런던의 금융가에 고스란히 건네졌다. 이 과두제 세력이 문제의 핵심이다.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한데도 땅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고, 대다수 국민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개혁을 내세운 페론이 각광을 받았다. 전국 토지의 3분의 1을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했다. 아르헨티나에 비로소 중산층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페론정권 시절이 그나마 가장 안정된 시기가 됐다. 외채도 별로 없었다. 그 결과 소비가 촉진되고, 아르헨티나는 세계 5위의 경제력을 구가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농업국이던 아르헨티나를 공업국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 시작됐다. 이런 결과 페론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지난 백 년간 아르헨티나에서 임기를 모두 마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하나가 됐다.

 

페론정권의 문제는 경제보다는 정치에 있다. 페론에게 잘못이 있다면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뿌리 깊은 적대감을 자신의 상징으로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결국 해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군부정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페론을 몰아내고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의 외국종속을 심화시켰다. 외채만 해도 페론정권 때는 96억 달러에 그쳤지만, 끊임없이 늘어나 15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도로건설권, 석유채굴권은 물론 주민등록증 발급업무까지 외국기업에 넘길 정도로 국영기업을 매각했다.

 

모든 정치인은 포퓰리스트라는 말이 있다. 정치를 정의하는 현실적인 명제다. 지지를 받지 않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전체 인구의 절반인 1800만 명이 월소득 245달러를 밑도는 빈민층이다. 페론 시대에 형성된 중산층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페론을 그리워하는 페론현상이 생겨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원인을 페론주의에서 찾고 있다. ‘경제적 포퓰리즘’과 노동계급의 무리한 요구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지하의 페론이 억울해 할 일이다.

 

정책이 인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옳느냐 그르냐 하는 것은 다르다. 옳으면서도 인기 있는 정책이 있고, 옳지도 않고 인기도 없는 정책도 있다. 옳은 정책을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대중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이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주의와 대립되는 민중주의라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 최근“인기를 끌고 인심을 얻는 데는 관심이 없으며, 대한민국을 선진화하고 모든 분야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는 단단한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이나 세종시반대등의 정책을 독선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이야기다.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신념도 문제지만 엘리트주의까지 가진것 같아 경악스러울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분이 엘리트처럼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2008년 시민의 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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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르 동맹

 

아메리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메리카합중국, 즉 미국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미국이 아닌 다른나라들이 많고 그들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을 대단히 싫어한다. 미국중심의 사고방식을 갖는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앵글로아메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로 구분한다. 이는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유래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남미의 꿈 볼리바르

미국독립혁명의 상징이 워싱턴이라면 라틴아메리카 독립혁명의 상징은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이다. 보통 ‘해방자(el Liberator)’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볼리비아라는 국가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봅리바르는 남미 공동체의 국부의 개념으로 추앙받는다.

볼리바르는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에서 부유한 에스파냐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이 그랬듯이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수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편한 삶을 버리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811년 독립전쟁이 실패한 후 4차례에 걸친 망명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행동을 계속 지휘한다. 마침내 1819년 뉴그라나다(New Granada:콜롬비아)를, 1821년 베네수엘라를, 그리고 1822년 키토(Quito:에콰도르)를 에스파냐로부터 해방시키고, 3국을 합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여 그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1823년 페루의 독립운동가 산 마르틴의 요청을 받고 페루로 건너가 1824년 페루에 남아 있던 에스파냐군을 격파하여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또 페루 북부(볼리비아)에 남아 있는 에스파냐군의 잔당을 그의 부하 수크레에게 소탕시키게 하여, 1825년 볼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의 이상은 미국처럼 라틴 아메리카를 아우르는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을 건설하고 인종차별 없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독립한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 아이티도 그의 모델이었다. 체게바라에게 쿠바가 그런 의미였듯이 말이다.

그래서 독립전쟁이 일단락되면서 1826년 에스파냐계 공동체를 목표로 한 파나마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해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의도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이 해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얼마 안 가서 실의와 곤궁 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1826년 그가 소집한 파나마회의는 ‘범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에 불과했다. 20년의 독립운동기간이 있었음에도 그는 젊었다. 그러나 그의 거대한 구상에 관심 없는 대토지소유귀족들은 ‘합중국’을 원하지 않았다. 실망한 볼리바르는 남미 여행을 떠나고 여행중에 사망하고 만다.

 

새로운 시작 볼리바르동맹

이런 볼리바르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체게바라다. 체게바라에 대해 남미 사람들이 가지는 깊은 애정은 민중적인 문화에서 유래된 측면도 있지만 역사속의 볼리바르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이상이 왜곡되는 것에 대해 실망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을 버리는 용기, 그것은 존경할만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중남미 좌파 국가 모임인 ‘미주(美洲)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의 9개 회원국은 얼마전 회의를 열어, 내년부터 역내 무역 결제에 공동 가상 결제통화인 ‘수크레(SUCRE)’를 달러화 대신 사용하기로 했다. 때문에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가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볼리바르는 생전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미국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다. 미국이 중남미의 나라들에게 매우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볼리바르의 날카로운 예측은 결국 사실이 되었다. 쿠바 침공, 파나마 침공,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등 미국은 중남미를 자신의 뒷마당이나 되는 양 마음대로 주물러 왔다.

볼리바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꿈이 살아나고 있다. 남미는 미국의 앞마당이라며 세계지배질서의 터전으로 인식하던 미국의 반응이 궁금하다. 볼리바르에 대한 역사적인 그리움과 함께, 미국을 조심하라는 볼리바르의 경고를 같이 기억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볼리바르의 낭만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창수(편집위원)

 
이 글은 2008년 시민사회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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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 신앙으로 무장하고 낮은세율로 제국을 건설하다 

 

이슬람의 사회개혁

혼란의 시대에는 종교가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는 처음에는 사회혁명적인 주장으로 소외받는 대중들에게 파고 들고, 공동체를 만든다. 비록 주술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그 너머에는 비록 비현실적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처럼,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내용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체제가 만들어지고 권력이 생기면 초기의 사회혁명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체제유지의 도구가 되고 만다. 종말론을 주장했던 많은 종교가 그렇게 현실의 권력이 되었다.

 

가장 빠른 시간동안 제국을 형성한 이슬람은 이러한 종교의 정치학을 가장 강력하게 구현한 종교일 것이다. 마호멧은 처음에 신자들사이의 보편을 주장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다. 부자들도 자선을 베푸는 조건으로 포용했다. 여성에게도 적지않은 호소력이 있었다. 여성보다 우월한(혹은 하다면)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설교했으며 재산권도 허용했다.

 

종교를 창업한 사람이 직접 제국을 건설한 사례는 흔치않다. 특히 그 사후에 역동적 힘을 발휘한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마호멧은 그런 대표적인 선지자 이자 지도자이다. 순수하게 종교적인 측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화나 종교관행과 커다란 차이는 없다. 가장 큰 차이는 그의 설교는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강령이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당시 ‘야만사회’를 질서 있는 ‘움마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이슬람에 있어서 확장전쟁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앙과 낮은 세율로 제국을 건설

 630년 메카를 점령한 후 2년후 사망한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메시지를 이어받은 후계자들은 정복전쟁을 계속한다. 그리고 642년에는 이집트까지 정복함으로서 20년 만에 이집트에서 시리아,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들의 성공은 사막의 ‘말’인 낙타를 이용한 전투력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것은 비잔틴이나, 페르시아 등 낡은 제국들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던 사람들을 사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새로운 국가구조를 만들지도 않았고, 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신앙을 존중했다. 단지 세금을 정기적으로 납부하라고 요구했고, 저항한 귀족들의 토지와 국가소유의 토지를 압류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유대인 페르시아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인 등 주민대다수는 훨씬 나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는 유대인 작가는 ‘조물주는 인간을 악에서 구하시려고 이스마엘(아랍)왕국을 주셨다’고 찬양할 정도였다.

 

당시 아랍인들은 종교세로 소득의 2.5%를 내는 것 외에는 세금이 없었다. 다만 국유지를 빌려주는 경우에는 10%의 세금을 받았다. 비이슬람인들에게는 이전에 비쟌틴에 내던 세금을 그대로 받았으나, 공정하고 정확했기 때문에 불만은 적었다. 더구나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개종도 자유로왔다.

 

이렇게 신앙으로 무장하고 낮은세율로 침략하는 이슬람세력을 사치와 착취에 기반한 거대 제국들이 이겨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백년이 채 되지않아 이들은 서로는 프랑스부터 동으로는 인더스강까지, 북으로는 탈라스에서 당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강압도 없는데 개종하면 세금을 적게 낸다는 것은 이슬람의 확산에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하게 되었고 비아랍계 무슬림(이슬람교도)이 제국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다수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들 개종자들을 ‘마왈리’라고 부른다.

 

초기의 정신을 잃고 제국도 잃는다.

 초기에 아랍인들은 종교를 설파하는 성전이라는 명분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정복이 정체되고 새로운 개종자들이 평등을 요구하자 돌변했다. 마왈리들을 차별하고 특권을 배제한 것이다. 결국 그들의 평등한 공동체는 아랍인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점이었던 공동체의 신앙이 생명력을 잃게 되면서 제국은 정체되고 급속한 혼란이 오게 된다. 초기의 종교적 신심은 제국이 건설되고 권력이 생기자 방어하는 종교적 논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종교를 확장시키려고 성전을 벌여놓고는 개종하지말라고 협박하는 상황인 것이다.

 

초기 시아파와 수니파의 시작은 이러한 갈등구조에서 시작되었다 정통 마호멧의 후계자인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는 오히려 아랍부족이 아닌 폐르시아 등 타 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슬람화된 사회에서 초기 공동체의 이상을 가지고 천년왕국의 검은 깃발을 내세운 것이다. 실제로 이들을 기반으로 아바스 왕조가 건설되기도 했다.

 

아무튼 아랍인들은 초기의 열정이 식고, 무슬림이 무조건 많아지는 것이 자신들에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개종을 권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말리고 억압하기까지 했다. 세입감소를 우려하여 농촌으로 쫒아버리기까지 했다. 아랍여인과의 결혼은 꿈도 꿀수 없었다.

 

이들이 평등한 공동체라는 종교적인 원칙까지 무시하면서 마왈리들을 탄압했던 것은 당시 이슬람을 지배한 우마이야 왕조가 소수의 아랍인이 세금을 내는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전제위에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왈리에게 동등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곧 세입의 감소와 세출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구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마왈리와 아랍인의 구분이 인종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아랍인을 의미하는 디완(인명부, 연금대상자)에 등록되지않는 아랍하류층도 사실상 마왈리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노력을 하더라도 이들 개종자들인 마왈리들은 이미 군대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알리의 당,’운동 등 세로운 세력을 형성하면서 마침내 아랍인이 지배하는 이슬람제국은 무너지고 분열하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의 팽창은 당분간 멈추게 되고 각 민족들은 특유의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것이 이슬람이 아랍을 벗어나는 세계종교가 된 이유이고, 동시에 아랍인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들어내지 못한 세계제국의 이유가 된다. 제국을 원하거든 제국을 이룬 이유를 알아야 하고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참고도서

김정위, <중동사>, 대한교과서. 1987

버나드 루이스, 김호동 역, <이슬람 1400년>, 까치. 1994

정수일. <이슬람문명>, 창작과비평사. 2002

진원숙. <충돌의 역사>, 신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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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은 문명성찰의 기회
 
 
우리 인류역사에서 인구가 감소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을 들라면 우선은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제일 큰 원인은 뜻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다. 그나마 전쟁에서도 직접 전투 중에 사망한 경우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전투에서는 대개 사망자보다 부상자나 포로가 많다.

가장 유명한 전염병은 흑사병이다. 흑사병은 페스트(pestis)라고도 한다. 증상으로 피부 밑에 검은 피물집이 생기기 때문에 흑사병이라 했다. 흑사병은 역사상 단 한번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했다. 흑사병에 따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장 커다란 피해가 발생한 것은 1348년에 시작된 흑사병이다. 자그마치 50여 년 동안 전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2천500만여 명이 사망했다. 유럽은 200년이 지난 13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구를 회복한다. 이후 흑사병이 다시 유행한 것은 1894년 중국의 광둥에서였다. 이 후 20년간 전세계에서 1천만 명이 사망했다.

 


흑사병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몽고족 유포설이다. 1347년 몽골 징기스칸의 후예인 킵차크칸국의 군대가 크림반도에 있었던 제노바의 교역소를 공격했다. 그때 몽고족이 페스트 환자의 시체를 대포로 쏘아보냈고, 페스트에 감염된 제노바인들로 인해 유럽에 페스트가 퍼졌다는 주장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로 믿는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것은 재앙의 원인을 외부에 전가하려는 심리속에서 나온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인종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맞물려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유럽에는 흑사병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고, 몽골 전래설을 증명할 직접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당시 중국도 페스트로 1340년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강남 어느 한 성(城)의 주민 90%가 사망하는 재앙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원인이 되어 몽골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28년 뒤 몽골제국은 붕괴했다. 몽골 역시 흑사병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흑사병의 직접적인 원인은 인구증가 때문이 아니다. 기근과 영양결핍 그리고 불량한 위생환경이 주된 이유이다. 따라서 구조적인 문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질병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사망자는 대부분 영양이 부족하고 비위생적인 생활조건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부자들의 사망률은 매우 낮았다. 부자들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서 흑사병이 지나간 집에 실험적으로 거주하게 했다. 전염병의 재앙 속에서도 계급성을 볼 수 있는 사례다.

전염병 피해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메리카 대륙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아메리카에는 구대륙에 못지않은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아메리카에는 이미 2천만 명이 넘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면 그 많은 아메리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후 200년 안에 95%의 아메리카인들이 사망했다. 그들은 전쟁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전해온 천연두를 비롯한 수십 가지의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의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유럽이 아메리카에 준 축복은 복음이 아니라 ‘전염병’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전염병은 이런 몰살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했고 흑인노예들을 수입해야했다.

당시 아메리카에는 가축이 단 5종에 불과했다. 칠면조, 라마, 기니피그, 사향물오리, 개가 전부였다. 소규모였고 인간과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전염병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유럽인의 출현과 그들의 선물인 세균은 면역력이 없었던 이들을 순식간에 멸망시켜버린다. 코르테즈가 600명으로 2천만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피사로가 168명으로 수천만의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숨어 있는 이유이다.

최근 사스와 광우병, 조류독감에 이어 신종인플루엔자가 유행하고 있다. 전염병은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다. 교통의 발달로 순식간에 전세계에 영향을 준다. 더구나 유전자 조작까지 하면서 위험요인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제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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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만든 ‘노블리스 오블리제’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뜻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제국을 이룬 그들 상류사회의 높은 도덕률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모범이 제국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종합적인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노블리스’는 고귀한 프랑스의 귀족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블리제’는 강요하다, 어쩔수 없이 무엇을 하게하다, 억지로 시키다, 의무를 지우다, 고맙게 여기게 하다 등으로 의무가 자발적인 것 이상임을 말해준다.

우선 로마를 보자. 보통 어떤 나라든 성장을 이루고 내부문제가 폭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는 반대였다. 고대로마는 초기에 왕정이었다. 나머지는 시민으로 파트리키(귀족)와 플레브스(평민)으로 구별했다. 이미 도시국가 시절에 공화정을 수립하고, 이후에는 양계급간에 격렬한 신분투쟁이 벌어지는데 그 절정은 BC 494년의 ‘성산사건’(聖山事件)이다. 평민들이 성산을 점거하고 협상을 요구한 것이다. 이때 지도자로 호민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호민관에게는 원로원의 결의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만들게 한 '칼레의 시민' - 로뎅의 조각상>



이후에도 로마는 귀족계급이 귀족주의적인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의 존재 필요성을 인정받기위해 결단을 내린다. 지금으로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스스로에게 강요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의 에너지가 맹목적인 지배국가인 다른 나라를 압도하게 되어 세계제국을 건설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그리스의 스파르타가 있는데, 그들은 압도적 다수의 헬롯(노예)폭동을 막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전자유민(사실상 귀족이다)에게 강요했다. 차이가 있다면 스파르타는 수동적이고 폭력적이라면, 로마는 적극적이고 고도화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도시국가와 제국의 차이로 나타났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사회봉사나 헌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권층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회적 특권과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서로 뭉쳐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지킨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사회적 긴장과 시스템이 그것을 이끌어낸 것이다.

어느 국가나 어느 정도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대국이 된다. 비슷한 사례로 몽골이 있다. 제국의 팽창기에 그들은 어떤 권력자도 법 앞에 평등한 원칙을 실현했다. 또한 모든 전리품도 나누었다. 지배자는 대신 명예와 존경을 원했다.

미국의 경우에도 19세기에 남북전쟁 등으로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엄청난 경제력 집중으로 인해 국가의 위기가 닥쳐왔다. 대중들이 록펠러 등 독점세력에게 가지는 증오는 폭동수준이었다. 사회당이나 인민당 등 새로운 정당까지 등장했다. 이에 정치권은 반독점법을 만들고, 독점세력도 록펠러 재단이나 카네기 재단 등을 만들어 부를 어느 정도 환원했다. 모두 잃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그런 긴장의 사회시스템 속에서 그들은 세계를 제패하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이후 상황이 바뀐다. 징병제가 폐지되고 보수세력의 이념전쟁이 승리하면서, 더구나 외부적 긴장세력인 소련이 망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색해진다. 그것은 굳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않아도 지배층이 자기재산과 특권을 빼앗길 위험이 없을 만큼 정교한 법과 제도, 그리고 대중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아프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0만이 넘는 군인 중 미국 의회의원의 아들이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긴장이 없어진 제국은 지금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다른 사례도 있다. 에릭슨을 만들어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발렌베리 가문은 자식들을 전원 사관학교에 보냈다. 더구나 그 가문에는 나치치하에서, 쉰들러리스트의 주인공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며  장렬히 죽은 영웅적인 외교관까지도 배출했다. 더구나 노조대표, 정부와 3자가 합의하여 사회협약을 체결, 스웨덴 사회복지의 한축이 되었다. 자본가들에게 악명 높은 스웨덴의 높은 세금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논란은 많지만 대약진운동 등 엄청난 정책실패에도 중국이 버틴 이유 역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지배 계급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역할이 크다.

한국의 보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꺼내기조차 민망하다. 최근 박정희기념관이 10년만에 모금목표액 500억 중 100억을 모금했다고 한다. 그나마 대기업을 제외한 개인기부는 12억원이다. 사회에 대한 환원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이념과 이익을 위해서도 돈을 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그나마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정운찬 총리의 행태를 보면서는 더더욱 말문이 막힌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천박하거나 자신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도 잃지 않으려다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그들을 긴장시키는 외에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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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밥 즉 쌀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말이다. 우리들의 주식은 쌀이다. 이 땅에서 벼가 언제부터 제배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록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싸리 출현한다. 하지만 유물로만 보면 시작은 매우 오래전부터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충북청원군 옥산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1만1천년전 이상) 볍씨가 발견되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경우도 있다. 아마도 인간이 무리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이땅의 사람들은 쌀을 먹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밥심이 생긴 것이다.

기록으로 보면 삼국사기의 백제본기가 가장 오래되었다. “백제 2대 문루왕이 즉위6년(32년)2월에 명을 내려 처음으로 벼를 심을 도전(벼논)을 만들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적극적인 식량생산을 위해 왕이 직접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밭작물만 재배한 고구려 사람들은 쌀을 먹지 못했다.


쌀은 국력이었다.

쌀은 귀하다 보니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세종때만해도 400여만 석의 쌀을 생산했다. 당시 인구가 6백만 정도 였으니 상당한 양이다. 이중 상당부분을 비축하고 여진과 일본에 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평화라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쌀이 곧 국력이었던 셈이다.

이러던 쌀은 조선시대 개항이후로는 큰 분쟁의 씨앗이 된다. 조선의 경제를 잠식한 일본은 1891년 한해만도 전체 생산량의 3분의1인 94만석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따라서 쌀값이 폭등했다. 그래서 쌀을 사기위해 당시 일본인이 만든 전당포에 옷과 물건을 맡기고 돈을 구어야했다. 결국 그 고리대로 인해 경제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당황한 조선정부는 쌀 방출을 막는 방곡령을 내려 일본과 충돌하였다.

아무튼 이때 가장 큰 재미를 본 사람은 미곡상이며 정미소 주인인 타운센트였는데 이를 조선사람들이 발음이 잘 되지않자 ‘담손이 방앗간’으로 불렀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정미소이다.

이런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재상이던 이용익은 안남미를 들여왔다. 안남미는 베트남에서 생산된 인디카 계통의 쌀로 우리쌀과 달리 찰기가 부족하다. 더구나 생전처음 외국쌀을 보게된 백성들의 반발은 거셌다. 당시 ‘수입쌀을 먹으면 에비 에미도 몰라 본다’ 등의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백성들은 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했고, 정체성훼손을 우려한 농민들은 격렬한 저항을 했다. 따라서 쌀은 최초의 수입 당부터시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수입되었다. 쌀수입개방문제는 처음부터 중요한 갈등이었던 셈이다.

해방 후에는 미국쌀이 수입되기 시작한다. 차이가 있다면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정치적 압력으로 수입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1969년에는 100만톤의 쌀을 수입되었다. 곡물메이저들이 쌀을 먹는 일본과 한국을 겨냥하여 생산한 켈리포니아산 쌀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밥심 좀 내보자

하지만 소득이 증가하면서 쌀은 계속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을 위해 저곡가 정책을 추진하던 정부는 쌀소비를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결국 혼분식 장려정책으로 5공정권에서는 마침내 쌀소비량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군사정권에서 혼분식장려를 위해 진행한 각종 캠페인이 일제시대에 쌀을 비하하던 내용과 거의 똑같았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쌀을 먹어서 조선사람이 머리가 나쁘다는 캠페인까지 할 정도였다. 산아제한정책과 혼분식 장려정책은 군사정권이 가장 성공한 정책이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저출산과 식랼수입대국이라는 부메랑을 맞았다. 결국 가장 실패한정책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미국정부와 곡물메이저들은 여전히 쌀수입을 강요했다. 그 결과 쌀 재고가 천만석이 넘기도 했다. 그래서 오래 묵은 쌀을 소비하기 위해 영세민과 군인들이 활용되었고, 정부미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온 계기가 된다.

미래학자들은 식량과 에너지가 미래의 분쟁의 핵심이 될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에너지와 달리 식량부족은 우리의 생존 그 자체가 문제로 된다. 그래서 국토가 우리 못지 않게 적은 유럽에서도 자국의 식량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최근 풍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쌀값이 폭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밥심을 주어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밥심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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