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종교분쟁과 우리의 차이
   

우리인식에 유럽은 ‘똘레랑스’ 즉 ‘관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종교분쟁이 상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몇 건의 커다란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단연 중요한 계기는 30년 전쟁이다.

독일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30년 동안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그 규모도 유럽 최대였다. 그런데 이 전쟁은 독일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30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개입된 최초의 국제전쟁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종교개혁가 후스의 고향이었던 보헤미아(지금 체코의 서부이다)에서 일어난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었다. 1617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니난드 2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신교도 예배를 중지하는 법을 공표하자 이에 반발한 신교도들이 궁을 습격해 고관 2명을 창문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죽지 않고 도망쳤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우발적 사건이 스웨덴과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 전 유럽이 참여하는 30년간의 전쟁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터였던 독일 지역은 국토의 5분의 4가 황폐해지고 1천600만명이던 인구도 약탈과 학살, 기근과 역병 속에서 600만으로 줄었다. 이런 결과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유럽에서는 신교든 가톨릭이든 종교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베스트팔렌조약(1648)으로 나타났다. ‘모든 군주는 자기 백성이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조약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을 바친 이후에야 종교적 집착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와진 것이다. 그 후 유럽의 다자간 정치질서를 ‘베스트팔렌체제’라고 한다.

전쟁의 최종결과는 신교도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가톨릭에 대한 보복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공존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가톨릭 국가였지만 경쟁국가 스페인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신교도를 지원한 프랑스의 역할이 컸고, 프랑스는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이때 독립을 공인받았고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위스의 중립은 그들의 노력도 있지만 엄청난 피를 본 유럽인들의 교훈 때문이었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일어난 마지막 종교전쟁이 되었고, 자유로운 국가들의 공동체로서의 유럽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져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시에 힘을 모으게 되어, 종교를 앞세운 전 세계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불행도 동시에 찾아왔다.

동양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종교분쟁이 거의 없었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 종교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전쟁은 누구에게도 이득을 주지 못하고 공동체의 황폐화만 가져온다. 물론 정치적인 이득을 보는 소수가 있을 것이다. 직선적인 역사관만큼이나 꼭 피를 보아야만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화도 안 된 사람들 때문인지 혹은 스스로를 서구인처럼 생각하여 타종교인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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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접어든 현대사회에서도 이름뿐인 존재이지만 왕이 있다. 또한 대부분의 나라에는 왕이 있거나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가 존재해왔다. 비록 직접통치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에서도 왕정폐지론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왕실들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존경받는 건강한 보수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상징하면서 가장 존경받는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국왕이나 문제는 많지만 품위를 지키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표적인 왕들이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다. 비록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자칭 ‘새로운 우익’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분명히 수천년을 이어온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후손인 영친왕 이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광복 후 18년이나 지난 1963년 귀국한다. 해방이 되고서도 귀국하지 못했던 것은 이승만 때문이다. 명분은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이었지만, 이면에는 이 씨 양녕대군파인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을 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화폐인물이 모두 이 씨라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아무튼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영친왕을 귀국시킨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를 신기한 사람으로 바라보았을 뿐 관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것은 탄압이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조선의 왕족들이 자초한 것이다.

의친왕 이강(李堈) 정도가 일제에 비협조의 저항 했을 뿐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제에 순응했다. 더구나 지배층을 형성하던 양반층에서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수가 일제에 협조했다. 신기한 것은 800명의 군대 대부분은 의병이 되거나 낙향하여 교육사업 등을 벌여 저항했으나 4천200여명의 중앙관료들과 경찰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에 부역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한일 합방을 한 다음날 1천700만원의 은사금을 각 지방의 양반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때 쌀 한섬이 3원이었으니 지금 시세로도 1조에 육박하고, 당시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을 다 사고도 남을 정도의 규모였다. 조선의 지배층이 돈을 받고 나라를 판 것이다.

또한 1910년 10월 76명의 양반이 후작, 자작, 남작으로 구성된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을 받았다. 한마디로 매국노들에게 일본귀족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이중 민영환이 자살로서 항의하는 등 13명이 거절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감읍해 했다. 당시 친일파 귀족들이 수령한 은사금은 모두 605만엔으로,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3천6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이완용은 당시 15만엔을 은사금으로 받았는데, 금값을 기준으로 현재의 30억원에 해당한다. 특히 총리 대신에 오른 직후인 1907∼1910년 전국에 걸쳐 15건의 재산증식이 이뤄졌다.

이러니 우리나라에만 왕당파가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혁명 등의 역사적 단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역할을 포기한 나머지 대중들에게 잊혀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조상이 명문집안이었다고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조상님들은 얼마에 나라를 팔았소?”   

 

 

* 이 글은 2008년 8월 25일 시민사회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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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나라살림흥망사2

 

문자의 발명

문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에 대해 많은 학설이 있다. 서로의 약속에 의해 생겼다는 유물론적인 견해에서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해서라는 관념론적인 견해까지 아주 다양하다.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이겠지만, 다양하게 해석해 보면서 진실에 접근해갈 수 있다.

 

이중에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기원전 4천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문명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고민이 생겼다. 공동체가 관개수로를 건설하면서 생산력이 증대하자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사람이 늘어나자 마을의 살림을 맡은 족장들은 고민이 생겼다. 부족원이 많아지면서 누가 세금을 냈는지를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점토판에 기록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벼이삭 모양은 밀이라는 뜻이고, 소머리모양은 소를 표시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약속한 것을 점토판에 그리고 누가 얼마를 냈는지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기호를 문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설형문자이다. 바로 문자는 세금을 걷고, 관리하며, 사용하기 위해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셈이다.

 

 

문명과 함께 시작된 조직, 지도자는 지배자로

문명은 두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식량을 뺏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의 집약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 있었다. 전쟁은 제로섬 정도가 아니라 마이너스섬 게임이지만 농업발전은 플러스섬 게임이다. 당연히 협동을 위해 공동체가 생긴다. 협동을 통해 ‘관개와 배수공사’를 해야만 경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식량은 창고에 보관했다. 이를 저장하고 분배하면서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창고는 최초의 신전이 되었고 창고관리자는 최초의 사제였다. 그리고 문자를 기록하게 되면서 지식이 쌓이고 우주의 움직임까지 설명하는 마술적인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모든 강에서 문명이 발달한 것은 아니다. 기름진 양쯔강유역보다 척박한 황허강 유역이 문명을 건설한 것을 보면, 인간의 대응에 따라 달라질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이런 의미에서 이집트는 축복받은 곳이었다. 축복은 나일강이 선물한 것이다. 길이가 6650km나 되는 세계최대의 나일 강은 아프리카 대륙의 10분의 1이나 되는 유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수량이 엄청나다. 따라서 막대한 양의 토사를 하류에 실어 날랐고 이 토사가 하류의 삼각주를 기름지게 만들어 비료 한번 쓰지 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이집트의 밀이 제국을 지탱해 주었고, 18세기에도 여전히 프랑스보다 두 배나 많은 밀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일 강의 범람은 풍요를 약속하는 나일여신의 축복이다’라는 말도 있다.

 

당시 피라미드는 홍수로 일할 수 없는 7월에 건설되었다. 나일 강은 열대지방에서 시작되는데 5월에 열대성호우가 내리면 하류까지 오는 데 2달이 걸렸다. 그래서 이집트에는 7월에야 홍수가 발생하는데 말이 홍수지 날씨도 화창하고 물살도 매우 약해서 주변을 거의 파괴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홍수와는 개념이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홍수는 홍수여서, 농한기가 한여름에 있었던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10년씩이나 걸렸던 이유는 이렇게 짬짬이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집트에서 측량술이 발달한 이유는 홍수로 쓸려가서 경계선이 없어진 농토의 소유지를 구분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수가 심하면 세금을 늘려 잡았다는 점이다. 홍수가 심할수록 더 많은 토사가 내려와서 땅이 기름지게 되고 그 해에는 풍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홍수가 발생하지 않으면 흉년이 되어 기근이 발생하는 국가위기상황이 되었다. 왕조가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홍수와 가뭄의 경계는 불과 몇 미터의 수위 차이였다.

 

 

 

축복을 신전건설로 낭비한 이집트

나라가 잘사는 것과 국민이 잘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도 성장과 국민들의 경제생활이 상관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삶이 더 고달파 질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피라미드는 노예들이 건설하지 않았다. 대부분 농부들이었다. 농부들은 연중대부분을 들판에서 보내고, 파라오에게 군역을 졌으며, 2년에 한번씩 징수관이 와서 새로 세금을 매겼다.

 

이집트에게는 나일강이라는 축복이 있었다. 홍수도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조건일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재앙이 될수도 있었다. 우선 지배계층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소비한다. 위협이 없으면 다른 일을 벌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념물의 건립이다.

 

지배계층은 자신이나 자신의 기념물에 갈수록 많은 자원을 소비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신관들의 세력을 누른 파라오들이 자신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리고 그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여름철 농한기에 농민들에게 소득을 분배하는 공공근로같은 경기부양효과를 노렸다는 분석도 있다. 이집트의 노동자는 매달 1.5자루의 보리와 네자루의 에머밀을 받았고, 서기와 조장은 두자루의 보리와 5.5자루의 에머밀을 받았다.

 

결국은 자신들이 권력유지와, 자의식을 채우기 위한 전시행정에 자원을 소비하고 사람들을 고달프게 한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문명은 일찍부터 정체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는 문자를 아는 즉 왕과 귀족관료들만이 알았다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짧고 고달픈 생활속에서 이런문제를 알수 없었다. 그래서 애덤스미드는 이 당시의 노예들을 ‘눈먼 자들’이라고 불렸다고 했다.

투명성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공통으로 이어지는 문제이다. 마치 당시에 신관들이 자기들만이 문자를 알고 기록하고 보여주지 않았듯이, 지금 권력자들도 자기들만의 언어(혹은 방식)으로 기록하고 시민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지금의 4대강이나, 대규모 국책사업, 더 나아가 대자본의 거대빌딩들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물론 용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눈먼 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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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송주영. 이집트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1

레리 고닉. 이희재 옮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1. 궁리 2006

조루즈 장. 문자의 역사. 시공사 2002

정규영.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여름언덕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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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스포츠 정신을 이야기할 때 근거로 드는 것이 고대에 1200년간이나 열렸던(기원전 776∼기원후 393, 293회 개최) 올림픽이다. 그래서 현대 올림픽의 타락과 승부에 집착하는 스포츠 현실을 개탄하는 사람들은 항상 고대 올림픽의 순수성을 되찾자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대 올림픽은 순수한 아마추어의 무대가 아니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시작하는 첫날 모든 선수들과 심판들이 올림피아의 평의회장 앞에 있는 ‘서약의 제우스’상 앞에서 부정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선서했다. 제우스상은 양손에 번개를 들고 있는데 부정을 저지르면 벼락을 맞을 줄 알라는 경고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각종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제로 올림피아에는 많은 제우스 동상 받침대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부정을 저지른 자가 낸 벌금으로 제작된 것이었고 동상마다 그 이유가 적혀 있었다.


대표적인 부정은 뇌물을 먹이거나 국적을 속이는 것이다. 112회 올림픽(기원전 332년) 때 아테네의 5종경기 선수가 상대에게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돼 벌금을 냈다. 재미있는 것은 아테네인들이 이 벌금을 취소하라며 올림픽보이콧을 선언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폴리스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고 결국 굴복한다. 또 돈에 매수되어 국적을 바꾸었다가 본국에서 추방당하는 선수도 있었다.


아마추어 정신을 철저히 지킨 것도 아니었다. 출전 선수들은 월계관을 쓰는 영예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월계관은 귀한 집안의 자제가 금으로 만든 낫으로 직접 자른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치면 아마추어 정신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돈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각 폴리스는 우승을 독려하기 위해 우승자에게 막대한 특전을 부여했다. 동상을 세워주기도 하고 아테네에서는 상금과 함께 평생 공짜 식사를 제공했다. 아테네의 솔론 시대에는 올림피아 제전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500드라크라를, 지방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100드라크라의 포상금을 주었다. 1드라크라는 양 한 마리 혹은 곡식 1메딤도스(곡물의 단위)의 가치가 있었는데 500메딤도스의 땅을 가진 사람이 상류층이었다고 하니 경기에서 한번만 우승해도 당당히 상류층으로 편입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포상금은 훗날 나라간의 경쟁이 격화되자 3000드라크라까지 치솟았다.

 

 

 


선수들은 현재의 프로선수들처럼 다른 경기에도 출전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당시에는 올림픽말고도 경기대회가 많았다. 한 도시에 하나 이상의 경기대회가 있었으며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곳에서는 수십 개의 경기대회를 개최했다. 도시마다 우수한 선수를 유치하기 위해 상금을 내걸었고 당연히 이를 노리는 전문 직업 운동선수들이 등장했다.

한마디로 프로선수가 등장한 것인데 그 수가 상당했다. 특별히 프로와 아마추어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선수들 대부분이 프로화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처음에는 상류 계급에 한정되던 출전 자격이 외국인은 물론 하층 계급에게로 확대되었다. 엄청난 돈과 신분상승, 그리고 국가의 위신, 엄밀한 의미에서 고대 올림픽 선수들은 아마추어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우리는 올림픽 기간만큼은 ‘올림픽휴전’이라고 해서 전쟁도 중지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이 많았다. 폐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그 예다. 스파르타는 90회 올림픽 때 전쟁을 벌여 벌금을 부과 내야 했는데 이것을 거부했다가 제명당하기도 했다. 더 심한 경우는 엘리스와 피사의 전쟁이다. 올림픽은 본래 피사에서 열렸다가 올림피아가 있던 엘리스에서 개최되었다. 피사는 주최권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가 패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올림픽 주최권 문제가 전쟁도 부른 것이다.


관계자만 4만 명이 모이는 큰 행사였기 때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도 많았다. 정치가들은 자기 세력을 과시했고 선수를 매수하기도 했다. 웅변가나 시인, 평론가, 예술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벌기 위해 모여 들었다.


결국 돈, 명예, 정치를 떠난 ‘순수’한 올림픽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소망이었을 뿐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올림픽의 초기 정신이다. 올림픽의 초기 정신은 전쟁을 중단하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제전을 개최하여 우정을 두텁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올림픽의 개최지는 신성지역으로 구분되어 성을 쌓지도 못하고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도 없는 중립지역으로 선포되었다.


올림픽의 기원과 정신은 반전과 평화에서 시작했다. 당시 펠로폰네소스의 도시국가들은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더구나 페스트까지 창궐해 참담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위해 올림픽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올림픽은 통합의 상징이다. 1200년 동안 어떤 강대국이든 반전평화의 원칙을 지켜야 했다.


올림픽은 다원주의를 원칙으로 했다. 그래서 특정 종교를 강조하는 것도 금지했다. 올림픽이 중단된 것은 그리스가 로마에 합병되고 나서도 400년이 지난 395년이었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올림픽 제전을 이교도들의 종교행사로 규정해 폐지한 것이다.


1500년 후 쿠베르탱은 전쟁 등으로 피폐해진 유럽의 평화를 위해 올림픽을 다시 창시했다. 쿠베르탱은 고대 올림픽대회가 외부세력들이 올림픽 정신을 좀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IOC(국제올림픽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 IOC마저도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IOC와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이유가 혹시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하는 운동 상황을 보면 유치를 실패한 게 돈 벌 기회를 잃은 것 같아 더 소란스러운 것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그래도 원래 초기의 취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일 게다. 아직도 스포츠 정신을 위해 올림픽을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과거를 막연히 그리워할 게 아니라 진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원래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어땠는지를 제대로 보면서 교훈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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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엑스파일>은 외계인이 등장하는 음모론을 다룬 것 이라고 할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음모론을 끊임없이 신봉하고 열광해왔다. 그것은 음모론이 신비주의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불가사의한 현상뒤에 어떤 권력이나, 세력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식의 해석이 유행하면서 세상의 모든일이 음모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논리"로 설명 불가능한 모든 것이 "음모"로 설명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과학(논리)" 이전 시대에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던 "신비"의 대체 개념인지도 모른다. 즉 근대 이전의 "신비"가 오늘날에 와서는 "음모"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 자체는 무척이나 "유용한" 개념이다.  

 

가장 대중적인 혁명중의 하나인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도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쟈코뱅당은 프랑스 혁명당시 온건파 지롱드당에 반하여 과격파로 분류되던 정파이다. 프랑스 혁명당시 예수회 수사였던 아베 바루엘은  “자코뱅주의의 역사에 대한 회고록”이라는 책에서 혁명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쟈코뱅당 핵심인사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고 주장한다. 자코뱅은 프랑스혁명 때 제3 신분 대표들이 자주 모였던 수도원의 이름이다.

역사가인 토크빌은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오히려 경제발전과 정치적 자유의 확장에서 찾았다. 이전보다 악은 적어졌지만 악에 대한 국민의 감수성은 더 예리해져 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다. 음모론에 근거한 기득권층의 행태는 이런 감수성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음모론은 사회의 상황이나 역사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몇몇 때문에 모든상황이 일어나므로 그들만 제거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분히 개인주의적 사고의 확장이다. 그래서 역시나 음모를 자주 사용하는 파시즘에서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드라마 X파일 주인공 멀더의 사무실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 UFO 사진과 함께 "나는 믿고 싶다"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2차대전 전후 일어난 반유대주의 열풍은 ‘유대주의 음모론’이 촉발했다. 또한 동경대지진 같은 경우에도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음모론으로 재일 조선인들이 처참한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재미삼아 하더라도 문제가 되는데 ‘반드시 그렇다’라는 것은 현실정치와 대중적 망상과 결합하는 경우에  집단적인 광기를 불러올 수 있다.

 이른바 음모론의 "주역"으로 사람들이 지목하는 존재가 대개는 외계인, 외국인, 비밀결사 등 전형적인 "타인"이라는 점에서도 이런 파시즘적 논리가 드러난다. 즉 "우리"와 다른 "타인"이 "우리"를 해코지하려 한다는 피해망상의 논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음모론 자체도 "음모"일까?

지난 20여년의 민주화 결과 문제점에 대해 무척이나 감수성이 예민해진 우리국민들에게 음모론으로 터무니없는 억지주장을 펴는 것은 더욱더 우리 민족이 특별히 가지고 있다는 홧병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체스터튼이라는 작가의 <오소독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광인의 설명은 실제로 온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의 설명만큼 완벽하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대다수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이다. (...) 광인의 이론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그 많은 것을 많은 방법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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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정복자 메메드2세가 이끄는 투르크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였다. 오스만 술탄의 포병대는 과거 천년이 넘도록 강력한 군대들이 점령하지 못한 곳,  동로마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는 동로마제국을 구하려는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도시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영원한 줄 알았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이로서 1123년의 서사시가 막을 내렸다.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나라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가 기록되고 나서의 기록으로는 동로마제국이 가장 오래 지속된 국가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로마에 수도를 두었던 서로마제국의 몰락이 로마의 몰락이며 그 이후를 중세라고 생각하고 있다.

동로마제국의 판도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서유럽을 중심에 두고 보는 역사인식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도 않았다. 330년부터 자그마치 1453년까지 천년을 넘게 존속했다.

그 나라가 바로 동로마제국이다. 로마공화정의 시작인 BC 509년부터 따진다면 2천 년을 유지한 것이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이 1453년이었으니, 근대의 여명까지도 존속했던 셈이다.

만약 우리가 러시아나 동구의 영향을 받았다면 아마도 크리스마스도 12월 25일이 아니라 동로마제국 정교회의 영향을 받아 1월 7일에 기념했을 수도 있다.


‘빵과 서커스’로 지탱된 서로마

동서를 연결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서구 국가들은 동방과의 교역을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1488년 포르투갈 항해가 B.디아스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하고 1492년 C.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다. 그리고 세계를 제패하면서 역사의 중심을 그들에게 맞추어 버렸다. 동로마의 역사도 묻혀버렸다.

그러나 서유럽국가들은 동로마제국에 큰 빚을 지게 된다. 동로마의 유산과 유민들은 서유럽으로 이동하여 르네상스를 가져온다. 비로소 유럽이 어둠에서 깨어나게 된다. 종교개혁의 요구가 들풀처럼 전 유럽을 불태우면서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동로마는 서유럽이 근대로 넘어가는 가교역할을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서로마제국은 용병대장 ‘오토아케르’에 멸망당한다. 초기부터 시민군 중심으로 운영되던 서로마는 전쟁과정에서 획득된 노예 중심의 ‘라티푼디움’이라는 농장형태가 등장하면서 중소 농민이 몰락하게 된다. 그 잉여생산물은 몰락한 일반시민들에게 ‘빵과 서커스’로 제공된다. 번영의 결과를 가지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도 노예공급이 감소하면서 끝이 난다. 노예공급이 줄어들면서 대토지 소유자를 중심으로 ‘콜로나투스’라는 대농장이 형성되고 예속농민이 편입되고 서서히 농노화되어 중세시대 ‘장원’의 시초가 된다.


     동로마제국의 해전


현재와 비교해본다면 미국이 비슷하지 않을까? 과거 ‘빵과 서커스’에 의해 지탱되던 로마시민들의 운명처럼, 기축통화와 군사력 유지가 어려워지면 소비사회의 ‘복지와 스포츠’도 한계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중소농민이 주축이 된 동로마의 군대

이 나라는 어떻게 천년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을까?  테오도시우스성벽이 굳건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몇 가지 행운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여러 가지 답이 있겠지만 모든 것은 사람, 그 중에서도 강력한 군대가 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 병사들은 자신의 가족과 땅을 지키려는 ‘테메’의 병사들이었다. 테메는 소아시아의 징집병들이었고 그들은 ‘둔전병제’로 자신의 땅을 가진 중소농민들이었다. 중앙에는 ‘타그마타’라고 하는 용병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테메’가 국가방어에 주축이었다. 동로마 개혁의 역사는 이 테메를 이루는 중소농민을 지키고 확대하는 과정의 역사였다. 
 

성을지키는 동로마 병사들

 
초기에 동로마는 용병 위주였으나 7세기부터 이슬람 군대에게 계속 패배하면서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그래서 세금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군사적인 의무를 다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인 ‘테메’가 등장한다.

‘스트라티오테’라고도 불리는 이 농민군은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므로 효율적이고 저렴한 비용으로 유지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생계문제도 스스로 해결했다.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걷느냐’와 ‘어떻게 걷느냐’

동서양 공히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조세와 군역은 국력의 척도이다. 따라서 세금을 걷고 군사력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해주는 것이다.  그 핵심은 나라마다 다르게 표현하지만 자신의 땅을 소유하고 세금을 내며 군역에 종사하는 둔전병제에 있었다.

이들은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이나 직업군인들과 달라서 잃어버릴 것이 있는 계층이었다. 둔전병제의 시행은 공평하게 세금내고 군역을 수행하는 시민들이 국가의 중추로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국가적 결속력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조건을 제공해준다. 세금이란 ‘얼마나 걷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걷는가’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국가는 건국초기에는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조세의 형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게끔 노력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나 걷는가’만 중요하게 된다. 필연적으로 부의 집중과 불평등을 낳게 되고 사회적 일체감은 무너진다. 종국에는 그 ‘얼마’도 걷지 못하게 되는 ‘시스템 붕괴현상’에 직면하여 멸망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혁명으로 땅과 집이 생긴 지원병들로 이루어져, 용병으로 이루어진 다른 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유럽을 제패한 것도 좋은 예이다. 또한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많은 전쟁에서 지면서도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둔전병제로 인한 군대의 확보와 재정의 안정 때문이다.


양극화가 초래할 잘못된 미래

우리나라의 양반은 군역과 요역 등에서 면제받고 전세도 내지 않았다. 자칭 ‘사대부’라 칭하면서 고통은 민중에게 전가시키고 자신들은 권력을 행사했다. 영조시대에 양반의 비율은 50%를 넘었다. 1995년 갑오경장 당시에는 양반의 비율이 80%를 넘었기 때문에, 해방시킨 공노비의 수가 5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극소수의 사람이 세금을 내고 군역을 수행한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과거의 둔전병은 ‘현대판 중산층’이 아닐까 한다. 부의 분산과 그로인한 공평한 과세 이것이 동로마제국의 병사들이 목숨 걸고 국가공동체를 지켜야하는 이유였고 그들이 천년을 지속하게 된 이유이다. 군역도 세금의 일종이다.

소수에 의한 부의 집중, 그리고 서민들의 중과세, 부유계층의 조세회피는 국가공동체를 심각하게 균열시키는 요소이다. 지금 급속히 진행되는 양극화는 이런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보이고 있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잘못된 과거는 잘못된 미래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직시하자.

 

Posted by flashfresh

운하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장 거대한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이다. 운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운하는 교통을 위한 수운용과 홍수조절을 위한 관개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처음에 인류는 물길을 파서 홍수조절을 위한 관개를 했다. 그러다가 물길을 보다 넓고 깊게 만들어서 배를 띄우면서 운하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베이징과 항조우를 잇는 대운하는 서기 5세기에 시작해서 20세기 초에 완공됐다. 그중에서 운하를 건설하다가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혀 몰락한 수양제도 있다.

유럽에서는 12세기에 이태리 반도의 베네치아는 바다에 면한 늪지대에 운하를 파서 대단한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또한 1770년대 들어 영국은 하천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도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다. 산업혁명으로 마차를 이용하는 육상운송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도 건국초 부터 대규모의 운하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1830년 들어 운하건설 붐은 수그러들었다. 그것은 새로운 대규모 교통수단인 철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운하로 운송되는 물량은 대폭 감소했고, 1920년대 들어선 작은 운하들이 방치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운하는 손꼽을 정도이고 관광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운송수단으로서 운하는 철도의 등장과 더불어 역사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재 사용 중인 운하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도가 등장하기 전에 건설한 것들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도로와 자동차의 발달로 철도마저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운행 중인 철도는 대부분 고속도로와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건설된 것들이다.

우리나라에도 운하에 대한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중단되었다. 예를 들면 태종때 신하들이 한강부터 남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주장하자 “우리 땅이 운하를 파기에 맞지 않아서 중국처럼 운하를 팔수 없다”라고 거부했다. 하지만 관료들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1만명이면 충분하니 일단 한번 시험해보자고 하자 재차 주장하자 백성들의 고통이 원래 거부하는 이유라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진행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나라의 왕조들이 오래 지탱한 비결이기도 했던 것이다.

파나마 운하를 확장하는 사업에 대한 파나마의 국민투표가 압도적 표차로 통과되었다고 한다. 파나마 운하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57%의 국민들이 기권했고 공사과정에서의 부패가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은 하루 기준 38~40대에 불과하고 2005년도 파나마정부에 4억8900만달러 수익을 준 것이 전부라고 한다. 가난한 파나마에서야 이정도 돈이라면 환경이던 어떤 문제건 상관없이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할 조건도 아닌 우리나라에 운하를 놓자고 주장하는 시대착오적인 건설족들을 보노라면 그나마 인프라 건설이라는 부분만큼은 진정성을 가졌던 수양제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다.

Posted by flashfresh

 

모처럼 서울 시내 도로가 한산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났기 때문이다. 한산한 도로를 보면 우리 교통이 얼마나 혼잡한가를 새삼 알게 된다. 사실 우리의 교통 혼잡은 전세계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다. 교통시설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승용차 의존도는 심해져 도시 교통 혼잡은 가중되고, 도시의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서울 등 대도시의 최근 10년간 인구는 연평균 0.06% 늘어났지만 승용차는 연평균 4.17% 증가했다. 도시지역 혼잡비용이 매년 4.7% 늘어나 2008년에는 17조원에 이르렀다.

교통 혼잡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교통유발부담금이다. 원인자 부담 및 수익자 부담 원칙에 의해 주택을 제외한 일정규모 시설물에 대해 부과하는 것으로 1990년부터 1000㎡ 이상의 건물에 대해, ㎡당 350원을 부과하고 있다. 더 이상 공급관리로는 문제를 풀 수 없기에 수요관리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다른 나라들이 시행하는 것을 참고한 것이다.

문제는 이 부담금의 기준이 지난 20년간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대부분의 지자체는 감경조처까지 취하여 2011년에는 징수액이 1751억원에 불과하다. 이 중 액수가 가장 많은 서울의 경우에도 혼잡비용이 7조원인데, 부담금 징수는 610억원에 불과하다.

최근 환경운동연합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63.9%의 시민들이 교통유발부담금 인상에 찬성했으며, 29.3%는 1000원으로의 인상에 찬성하기도 했다. 이는 서울시민의 차량 보유가 400만대에 달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압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달 중순 기획재정부 산하 부담금 심의위원회에서는 교통유발부담금 인상 심의를 논의할 예정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 일각에서는 경제에 부담을 주는 부담금을 축소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마치 감세나 규제완화를 할 때의 논리와 비슷하다.

정부는 법과 재정으로 공공성을 지켜낸다. 이 두 가지를 활용해서 지원과 규제를 한다. 부담금도 그 방법 중 하나다. 모든 법과 세금은 부담만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늘려야 할 것도 많다. 이런 의미에서 교통유발부담금은 수요관리 차원에서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교통부문은 에너지의 19.7%를 소비한다. 따라서 경쟁력과 환경문제 모두에 반드시 필요한 제도다. 교통유발을 한 원인자 부담은 당연하고, 교통수요를 줄이는 방향이어야 한다.

물론 형편에 따른 차등징수와 시설 소유자들의 자발적 수요관리를 유도하기 위한 지원정책이 필수적이다. 100%까지 감면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실효성이 높아지면 혼잡은 줄고, 대중교통이 활성화되며, 적자는 개선된다. 또한 대형 유통센터 등은 비용이 증가하여 전통시장이나 자영업자 등의 상대적인 경쟁력이 증가할 것이다. 환경개선은 당연히 따라온다.

정부의 한편에서는 교통유발부담금의 실효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선택은 단순하다. 실효성을 높이든지, 필요 없다면 폐지하는 것이다. 교통 혼잡의 원인과 해법을 명확히 해야 한다. 도로가 부족해서라면 도로 공급 중심의 성장정책으로 가야 한다. 차량이 많아서라면 부담금으로 수요를 관리해야 한다. 무엇이 지속가능할까. 솔직해져야 한다. 말로는 수요관리를 하겠다면서, 건물에는 부담금을 감면해주고, 전통시장과 대중교통 등에는 예산을 지원하는 모순되는 정책을 펴고 있다. 결국 밑 빠진 독처럼 예산만 낭비하는 지속 불가능한 정책이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Posted by flashfresh

감자

칠레, 페루 등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 볼리비아 코파카바나의 티티카카 호수(남아메리카 최대의 담수호로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지대) 근처에서 기원전 5C경 잉카인이 주식으로 재배를 시작했다.  

유럽에서 감자는 ‘악마의 작물’이라 불렸다. 16C 스페인 함대를 통해 유럽에 전파된 감자는 식물학자의 연구용으로 재배됐다. 식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먹지 않았다. 현재의 감자보다 더 작고 검어 보기 흉했던 점, 성경에도 실려 있지 않았던 점, 씨감자로 번식하는 점 때문에 ‘악마의 작물’이라고 해서 먹지 않았다.  

곤궁했던 유럽의 군주들은 감자 재배를 독려했다. 한랭기후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단위 면적당 수확량도 많아 구황작물로 감자 보급에 힘을 쏟았다.

프랑스는 왕비가 감자 꽃 장식을 하고 파티에 참석하고, 낮에 감자밭에 경비를 세우게 하고 밤에는 철수시켜 호기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아일랜드의 경우 정복자였던 잉글랜드 귀족이 감자 재배를 독려했다. 농민이 감자만 먹으면 귀족에게 돌아올 것이 더 늘어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1840년 감저전염병이 나돌았다. 오직감자 농사만 짓던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들었다. 많은 난민이 먹고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 때 이주민 중 미국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증조부가 포함돼 있었다. 잉글랜드의 감자정책이 낳은 정치적 부산물이었다.  

비타민이 풍부에 프랑스에서는 '밭에 나는 사과'라는 애칭을 얻었다. 감자는 영어로 포테이토(potato)다. 그런데 원래 포테이토는 고구마를 의미했는데 감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sweet potato로 불린다.  

국내에 감자가 전래된 것은 182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824~1825년 사이 관북에서 처음 들어왔다고 돼 있다.  

1832년 영국 상선이 전라북도 해안에 약 1개월간 머물렀는데 배에 타고 있던 선교사가 씨감자를 나눠주면서 재배법을 가르쳐 줬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에는 아일랜드와 비슷한 풍경이 기록돼 있다. 일부에서는 감자가 좋은 식량 대용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씨감자를 걷으려 했지만 백성들은 내놓지 않았다. 관아에서 감자 재배를 독려하면 노역과 함께 많은 세금을 걷어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감자는 수십 년 사이에 보급됐고 양주, 철원, 원주 등지에서 흉년에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Posted by 박신용철


인간은 언제나 죽음과 병의 위협에 직면해 왔다. 그래서 질병에 대한 치료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의료행위가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은 이집트이다.

BC 2700년경의 비석에 의사와 치과의사를 구분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의학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보면 의학서에 쓰여진 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중범죄로 처벌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의료행위에 대한 인간의 역사

이집트의 의학은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서양의학의 모태가 된다. 역사상 최초의 의사로 기록되어있는 사람은 임호텝(Imhotep)이다. BC 2600년경 이집트의 대신이었고, 피라미드를 설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부자들의 호출에만 응했다. 이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한계가 많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의학이 그리스에 전달되면서 물론 자유민들에 국한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의료행위를 하는 문제가 고민되었고 직업으로서의 의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술을 전수해준 이집트에 대한 선망은 매우 높아서 소크라테스마저도 선진국 이집트를 찬양할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BC 2600년경 황제(黃帝)가 의학교과서인 <내경>(內徑)을 만들어 의학을 확립했다. 그런데 양 문명의 의학은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은 외과적이고 해부학적인 것이 좀 더 중심이라면 동양은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 때문에 약재 중심으로 발전해온 점이 다른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학의 발전은 동서양 공히 상류층에 국한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들은 방치되거나 주술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히 공공의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과학의 발전과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대중의료의 필요성이 증대하면서 극복되기 시작한다. 18세기만 하여도 유럽의 병원에는 의사가 없었다. 당시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환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일종이 격리였다.

한때 빛 발한 북한의 공공의료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중국은 공공의료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할수 있다.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비슷한 수준의 공공의료정책을 시행했다. 삼국시대에 약부(藥部)나 약전 등의 기관을 설치하여 의료정책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사를 일본에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각 군현에 약점(藥店)을 두고 의사를 배치했다. 이때 이미 과거로 의사를 선발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독창적 의서인 동의보감의 발간 이후로는 시골 마을마다 균일화된 의료가 보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북한은 공공의료에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그래서 1982년에는 무상의료에 415명당 의사 한 명씩을 배치하고 의사담당제를 두어 책임지게 하였다. 당시 세계의 일부 지식인들이 북한에 대해 극찬을 한 이유 중에 공공의료의 완비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체제가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의 상황이다. 현재 북한의 의료상황은 절망적이다. 공공의료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의료물품 마저 없어 응급처치조차 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나 남북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매우 부족한 현 정권에서는 해답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Posted by 밑빠진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