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속의 포퓰리즘

 

포퓰리즘(populism)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를 가리킨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의 어원은 1891년 미국에서 결성된 포퓰리스트 정당인 인민당People's Party에 있다. 인민당은 당시 미국의 양대 정당인 민주당과 공화당에 대항하기 위해 농민과 노조의 지지를 기반으로 창당됐다. 당시 소외받던 흑인과 백인 농부를 지지 기반으로 한 이 당은, 1892년 대통령선거에서 1백만 표를 얻어 몇몇 주에서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누르고 승리하기도 했다.

 

보통 정치 지도자들은 정치 엘리트나 적대 세력이 저항하면 국민에 직접 호소해서 위기를 극복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개혁을 내세우는 한편으로 정치적 편의주의나 기회주의에 편승해 권력을 공고히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을 경멸하는 의미로 ‘포퓰리스트’라고 부른다. 포퓰리스트들은 인기에 영합하는 비합리적인 정책을 내세워 나라를 위기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대다수 언론에서는 포퓰리스트의 대표적인 인물로 으레 아르헨티나의 후안 도밍고 페론(1895~1974)을 든다. 페론은 심각한 아르헨티나 경제를 일컫는 ‘아르헨티나병’을 만든 장본인으로 불리운다. 1940년대에 세계 5대 부국에 들던 아르헨티나가 1945년 페론 대통령이 집권하고 포퓰리즘식 퍼붓기 분배정책을 펴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복지 지출을 마구 늘린 반면 소득세는 내렸고, 그 결과 재정적자가 쌓여갔다. 몇몇 정권이 이런 상황을 개혁하려고 노력하기도 했지만, 강력한 노조의 총파업 등 민중의 저항을 받아 모든 시도가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아르헨티나는 파탄에 이르게 됐고, 이런 까닭에 우리 주변에는 ‘아르헨티나병’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부정적인 시각은 잘못된 편견이다. 진실은 다르다. 지가상승과 농지확장으로 생겨난 부를 지주세력이 대부분 가져버렸고, 그 돈은 런던의 금융가에 고스란히 건네졌다. 이 과두제 세력이 문제의 핵심이다. 땅은 넓고 자원은 풍부한데도 땅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고, 대다수 국민들은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 개혁을 내세운 페론이 각광을 받았다. 전국 토지의 3분의 1을 토지개혁을 통해 분배했다. 아르헨티나에 비로소 중산층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역사에서 페론정권 시절이 그나마 가장 안정된 시기가 됐다. 외채도 별로 없었다. 그 결과 소비가 촉진되고, 아르헨티나는 세계 5위의 경제력을 구가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에서 농업국이던 아르헨티나를 공업국으로 탈바꿈하기 위한 노력이 본격 시작됐다. 이런 결과 페론은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지난 백 년간 아르헨티나에서 임기를 모두 마친 몇 안 되는 대통령 중 하나가 됐다.

 

페론정권의 문제는 경제보다는 정치에 있다. 페론에게 잘못이 있다면 정치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뿌리 깊은 적대감을 자신의 상징으로 하는 구도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결국 해결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지금의 아르헨티나의 경제위기는 군부정권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페론을 몰아내고 미국 등의 지원을 받아 집권한 군부독재 세력은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의 외국종속을 심화시켰다. 외채만 해도 페론정권 때는 96억 달러에 그쳤지만, 끊임없이 늘어나 1500억 달러에 이르렀다. 또한 신자유주의 정책에 따라 도로건설권, 석유채굴권은 물론 주민등록증 발급업무까지 외국기업에 넘길 정도로 국영기업을 매각했다.

 

모든 정치인은 포퓰리스트라는 말이 있다. 정치를 정의하는 현실적인 명제다. 지지를 받지 않고 정치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아르헨티나는 전체 인구의 절반인 1800만 명이 월소득 245달러를 밑도는 빈민층이다. 페론 시대에 형성된 중산층은 무너진 지 이미 오래다. 페론을 그리워하는 페론현상이 생겨난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의 보수세력은 아르헨티나 경제위기의 원인을 페론주의에서 찾고 있다. ‘경제적 포퓰리즘’과 노동계급의 무리한 요구가 만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지하의 페론이 억울해 할 일이다.

 

정책이 인기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과 옳느냐 그르냐 하는 것은 다르다. 옳으면서도 인기 있는 정책이 있고, 옳지도 않고 인기도 없는 정책도 있다. 옳은 정책을 국민들이 지지하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대중을 경멸하는, 엘리트주의에 물든 사고방식이다. 포퓰리즘은 엘리트주의와 대립되는 민중주의라는 또 다른 뜻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이 최근“인기를 끌고 인심을 얻는 데는 관심이 없으며, 대한민국을 선진화하고 모든 분야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다는 단단한 각오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대강이나 세종시반대등의 정책을 독선적으로 이어가겠다는 이야기다. 이해할 수 없는 대단한 신념도 문제지만 엘리트주의까지 가진것 같아 경악스러울 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분이 엘리트처럼 보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 칼럼은 2008년 시민의 신문에 기고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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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바르 동맹

 

아메리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메리카합중국, 즉 미국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매우 잘못된 생각이다. 아메리카 대륙에는 미국이 아닌 다른나라들이 많고 그들은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문화적인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을 대단히 싫어한다. 미국중심의 사고방식을 갖는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은 아메리카 대륙을 앵글로아메리카와 라틴 아메리카로 구분한다. 이는 국가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유래와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남미의 꿈 볼리바르

미국독립혁명의 상징이 워싱턴이라면 라틴아메리카 독립혁명의 상징은 ‘시몬 볼리바르(1783~1830)’이다. 보통 ‘해방자(el Liberator)’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볼리비아라는 국가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봅리바르는 남미 공동체의 국부의 개념으로 추앙받는다.

볼리바르는 베네주엘라의 카라카스에서 부유한 에스파냐 가계(家系)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다른 귀족들이 그랬듯이 유럽에서 교육을 받고 베네수엘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편한 삶을 버리고 험난한 독립운동에 참가하였다. 1811년 독립전쟁이 실패한 후 4차례에 걸친 망명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행동을 계속 지휘한다. 마침내 1819년 뉴그라나다(New Granada:콜롬비아)를, 1821년 베네수엘라를, 그리고 1822년 키토(Quito:에콰도르)를 에스파냐로부터 해방시키고, 3국을 합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여 그의 이상을 실현하였다.

1823년 페루의 독립운동가 산 마르틴의 요청을 받고 페루로 건너가 1824년 페루에 남아 있던 에스파냐군을 격파하여 그의 지배하에 두었다. 또 페루 북부(볼리비아)에 남아 있는 에스파냐군의 잔당을 그의 부하 수크레에게 소탕시키게 하여, 1825년 볼리비아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의 이상은 미국처럼 라틴 아메리카를 아우르는 ‘라틴아메리카 합중국’을 건설하고 인종차별 없는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당시 독립한 세계 최초의 흑인공화국 아이티도 그의 모델이었다. 체게바라에게 쿠바가 그런 의미였듯이 말이다.

그래서 독립전쟁이 일단락되면서 1826년 에스파냐계 공동체를 목표로 한 파나마회의를 개최하였으나, 각국 간의 대립과 이해관계가 얽혀 1830년 해체되었다. 이렇게 하여 그가 의도한 대콜롬비아공화국이 해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얼마 안 가서 실의와 곤궁 속에서 생애를 마쳤다. 그러나 1826년 그가 소집한 파나마회의는 ‘범아메리카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그의 당시 그의 나이는 43세에 불과했다. 20년의 독립운동기간이 있었음에도 그는 젊었다. 그러나 그의 거대한 구상에 관심 없는 대토지소유귀족들은 ‘합중국’을 원하지 않았다. 실망한 볼리바르는 남미 여행을 떠나고 여행중에 사망하고 만다.

 

새로운 시작 볼리바르동맹

이런 볼리바르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체게바라다. 체게바라에 대해 남미 사람들이 가지는 깊은 애정은 민중적인 문화에서 유래된 측면도 있지만 역사속의 볼리바르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졌음에도 자신의 이상이 왜곡되는 것에 대해 실망하고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자신을 버리는 용기, 그것은 존경할만 충분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최근 중남미 좌파 국가 모임인 ‘미주(美洲)를 위한 볼리바르 동맹(ALBA)’의 9개 회원국은 얼마전 회의를 열어, 내년부터 역내 무역 결제에 공동 가상 결제통화인 ‘수크레(SUCRE)’를 달러화 대신 사용하기로 했다. 때문에 기축통화로서의 달러의 지위가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볼리바르는 생전에 주위의 사람들에게 미국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다. 미국이 중남미의 나라들에게 매우 큰 위협이 될 것이라는 볼리바르의 날카로운 예측은 결국 사실이 되었다. 쿠바 침공, 파나마 침공,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등 미국은 중남미를 자신의 뒷마당이나 되는 양 마음대로 주물러 왔다.

볼리바르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꿈이 살아나고 있다. 남미는 미국의 앞마당이라며 세계지배질서의 터전으로 인식하던 미국의 반응이 궁금하다. 볼리바르에 대한 역사적인 그리움과 함께, 미국을 조심하라는 볼리바르의 경고를 같이 기억해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들에게 볼리바르의 낭만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정창수(편집위원)

 
이 글은 2008년 시민사회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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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 신앙으로 무장하고 낮은세율로 제국을 건설하다 

 

이슬람의 사회개혁

혼란의 시대에는 종교가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는 처음에는 사회혁명적인 주장으로 소외받는 대중들에게 파고 들고, 공동체를 만든다. 비록 주술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그 너머에는 비록 비현실적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처럼,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내용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체제가 만들어지고 권력이 생기면 초기의 사회혁명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체제유지의 도구가 되고 만다. 종말론을 주장했던 많은 종교가 그렇게 현실의 권력이 되었다.

 

가장 빠른 시간동안 제국을 형성한 이슬람은 이러한 종교의 정치학을 가장 강력하게 구현한 종교일 것이다. 마호멧은 처음에 신자들사이의 보편을 주장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다. 부자들도 자선을 베푸는 조건으로 포용했다. 여성에게도 적지않은 호소력이 있었다. 여성보다 우월한(혹은 하다면)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설교했으며 재산권도 허용했다.

 

종교를 창업한 사람이 직접 제국을 건설한 사례는 흔치않다. 특히 그 사후에 역동적 힘을 발휘한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마호멧은 그런 대표적인 선지자 이자 지도자이다. 순수하게 종교적인 측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화나 종교관행과 커다란 차이는 없다. 가장 큰 차이는 그의 설교는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강령이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당시 ‘야만사회’를 질서 있는 ‘움마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이슬람에 있어서 확장전쟁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앙과 낮은 세율로 제국을 건설

 630년 메카를 점령한 후 2년후 사망한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메시지를 이어받은 후계자들은 정복전쟁을 계속한다. 그리고 642년에는 이집트까지 정복함으로서 20년 만에 이집트에서 시리아,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들의 성공은 사막의 ‘말’인 낙타를 이용한 전투력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것은 비잔틴이나, 페르시아 등 낡은 제국들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던 사람들을 사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새로운 국가구조를 만들지도 않았고, 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신앙을 존중했다. 단지 세금을 정기적으로 납부하라고 요구했고, 저항한 귀족들의 토지와 국가소유의 토지를 압류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유대인 페르시아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인 등 주민대다수는 훨씬 나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는 유대인 작가는 ‘조물주는 인간을 악에서 구하시려고 이스마엘(아랍)왕국을 주셨다’고 찬양할 정도였다.

 

당시 아랍인들은 종교세로 소득의 2.5%를 내는 것 외에는 세금이 없었다. 다만 국유지를 빌려주는 경우에는 10%의 세금을 받았다. 비이슬람인들에게는 이전에 비쟌틴에 내던 세금을 그대로 받았으나, 공정하고 정확했기 때문에 불만은 적었다. 더구나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개종도 자유로왔다.

 

이렇게 신앙으로 무장하고 낮은세율로 침략하는 이슬람세력을 사치와 착취에 기반한 거대 제국들이 이겨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백년이 채 되지않아 이들은 서로는 프랑스부터 동으로는 인더스강까지, 북으로는 탈라스에서 당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강압도 없는데 개종하면 세금을 적게 낸다는 것은 이슬람의 확산에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하게 되었고 비아랍계 무슬림(이슬람교도)이 제국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다수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들 개종자들을 ‘마왈리’라고 부른다.

 

초기의 정신을 잃고 제국도 잃는다.

 초기에 아랍인들은 종교를 설파하는 성전이라는 명분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정복이 정체되고 새로운 개종자들이 평등을 요구하자 돌변했다. 마왈리들을 차별하고 특권을 배제한 것이다. 결국 그들의 평등한 공동체는 아랍인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점이었던 공동체의 신앙이 생명력을 잃게 되면서 제국은 정체되고 급속한 혼란이 오게 된다. 초기의 종교적 신심은 제국이 건설되고 권력이 생기자 방어하는 종교적 논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종교를 확장시키려고 성전을 벌여놓고는 개종하지말라고 협박하는 상황인 것이다.

 

초기 시아파와 수니파의 시작은 이러한 갈등구조에서 시작되었다 정통 마호멧의 후계자인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는 오히려 아랍부족이 아닌 폐르시아 등 타 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슬람화된 사회에서 초기 공동체의 이상을 가지고 천년왕국의 검은 깃발을 내세운 것이다. 실제로 이들을 기반으로 아바스 왕조가 건설되기도 했다.

 

아무튼 아랍인들은 초기의 열정이 식고, 무슬림이 무조건 많아지는 것이 자신들에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개종을 권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말리고 억압하기까지 했다. 세입감소를 우려하여 농촌으로 쫒아버리기까지 했다. 아랍여인과의 결혼은 꿈도 꿀수 없었다.

 

이들이 평등한 공동체라는 종교적인 원칙까지 무시하면서 마왈리들을 탄압했던 것은 당시 이슬람을 지배한 우마이야 왕조가 소수의 아랍인이 세금을 내는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전제위에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왈리에게 동등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곧 세입의 감소와 세출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구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마왈리와 아랍인의 구분이 인종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아랍인을 의미하는 디완(인명부, 연금대상자)에 등록되지않는 아랍하류층도 사실상 마왈리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노력을 하더라도 이들 개종자들인 마왈리들은 이미 군대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알리의 당,’운동 등 세로운 세력을 형성하면서 마침내 아랍인이 지배하는 이슬람제국은 무너지고 분열하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의 팽창은 당분간 멈추게 되고 각 민족들은 특유의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것이 이슬람이 아랍을 벗어나는 세계종교가 된 이유이고, 동시에 아랍인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들어내지 못한 세계제국의 이유가 된다. 제국을 원하거든 제국을 이룬 이유를 알아야 하고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참고도서

김정위, <중동사>, 대한교과서. 1987

버나드 루이스, 김호동 역, <이슬람 1400년>, 까치. 1994

정수일. <이슬람문명>, 창작과비평사. 2002

진원숙. <충돌의 역사>, 신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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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은 문명성찰의 기회
 
 
우리 인류역사에서 인구가 감소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을 들라면 우선은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제일 큰 원인은 뜻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다. 그나마 전쟁에서도 직접 전투 중에 사망한 경우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전투에서는 대개 사망자보다 부상자나 포로가 많다.

가장 유명한 전염병은 흑사병이다. 흑사병은 페스트(pestis)라고도 한다. 증상으로 피부 밑에 검은 피물집이 생기기 때문에 흑사병이라 했다. 흑사병은 역사상 단 한번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했다. 흑사병에 따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장 커다란 피해가 발생한 것은 1348년에 시작된 흑사병이다. 자그마치 50여 년 동안 전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2천500만여 명이 사망했다. 유럽은 200년이 지난 13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구를 회복한다. 이후 흑사병이 다시 유행한 것은 1894년 중국의 광둥에서였다. 이 후 20년간 전세계에서 1천만 명이 사망했다.

 


흑사병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몽고족 유포설이다. 1347년 몽골 징기스칸의 후예인 킵차크칸국의 군대가 크림반도에 있었던 제노바의 교역소를 공격했다. 그때 몽고족이 페스트 환자의 시체를 대포로 쏘아보냈고, 페스트에 감염된 제노바인들로 인해 유럽에 페스트가 퍼졌다는 주장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로 믿는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것은 재앙의 원인을 외부에 전가하려는 심리속에서 나온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인종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맞물려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유럽에는 흑사병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고, 몽골 전래설을 증명할 직접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당시 중국도 페스트로 1340년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강남 어느 한 성(城)의 주민 90%가 사망하는 재앙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원인이 되어 몽골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28년 뒤 몽골제국은 붕괴했다. 몽골 역시 흑사병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흑사병의 직접적인 원인은 인구증가 때문이 아니다. 기근과 영양결핍 그리고 불량한 위생환경이 주된 이유이다. 따라서 구조적인 문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질병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사망자는 대부분 영양이 부족하고 비위생적인 생활조건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부자들의 사망률은 매우 낮았다. 부자들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서 흑사병이 지나간 집에 실험적으로 거주하게 했다. 전염병의 재앙 속에서도 계급성을 볼 수 있는 사례다.

전염병 피해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메리카 대륙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아메리카에는 구대륙에 못지않은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아메리카에는 이미 2천만 명이 넘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면 그 많은 아메리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후 200년 안에 95%의 아메리카인들이 사망했다. 그들은 전쟁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전해온 천연두를 비롯한 수십 가지의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의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유럽이 아메리카에 준 축복은 복음이 아니라 ‘전염병’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전염병은 이런 몰살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했고 흑인노예들을 수입해야했다.

당시 아메리카에는 가축이 단 5종에 불과했다. 칠면조, 라마, 기니피그, 사향물오리, 개가 전부였다. 소규모였고 인간과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전염병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유럽인의 출현과 그들의 선물인 세균은 면역력이 없었던 이들을 순식간에 멸망시켜버린다. 코르테즈가 600명으로 2천만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피사로가 168명으로 수천만의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숨어 있는 이유이다.

최근 사스와 광우병, 조류독감에 이어 신종인플루엔자가 유행하고 있다. 전염병은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다. 교통의 발달로 순식간에 전세계에 영향을 준다. 더구나 유전자 조작까지 하면서 위험요인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제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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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만든 ‘노블리스 오블리제’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뜻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제국을 이룬 그들 상류사회의 높은 도덕률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모범이 제국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종합적인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노블리스’는 고귀한 프랑스의 귀족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블리제’는 강요하다, 어쩔수 없이 무엇을 하게하다, 억지로 시키다, 의무를 지우다, 고맙게 여기게 하다 등으로 의무가 자발적인 것 이상임을 말해준다.

우선 로마를 보자. 보통 어떤 나라든 성장을 이루고 내부문제가 폭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는 반대였다. 고대로마는 초기에 왕정이었다. 나머지는 시민으로 파트리키(귀족)와 플레브스(평민)으로 구별했다. 이미 도시국가 시절에 공화정을 수립하고, 이후에는 양계급간에 격렬한 신분투쟁이 벌어지는데 그 절정은 BC 494년의 ‘성산사건’(聖山事件)이다. 평민들이 성산을 점거하고 협상을 요구한 것이다. 이때 지도자로 호민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호민관에게는 원로원의 결의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만들게 한 '칼레의 시민' - 로뎅의 조각상>



이후에도 로마는 귀족계급이 귀족주의적인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의 존재 필요성을 인정받기위해 결단을 내린다. 지금으로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스스로에게 강요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의 에너지가 맹목적인 지배국가인 다른 나라를 압도하게 되어 세계제국을 건설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그리스의 스파르타가 있는데, 그들은 압도적 다수의 헬롯(노예)폭동을 막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전자유민(사실상 귀족이다)에게 강요했다. 차이가 있다면 스파르타는 수동적이고 폭력적이라면, 로마는 적극적이고 고도화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도시국가와 제국의 차이로 나타났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사회봉사나 헌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권층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회적 특권과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서로 뭉쳐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지킨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사회적 긴장과 시스템이 그것을 이끌어낸 것이다.

어느 국가나 어느 정도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대국이 된다. 비슷한 사례로 몽골이 있다. 제국의 팽창기에 그들은 어떤 권력자도 법 앞에 평등한 원칙을 실현했다. 또한 모든 전리품도 나누었다. 지배자는 대신 명예와 존경을 원했다.

미국의 경우에도 19세기에 남북전쟁 등으로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엄청난 경제력 집중으로 인해 국가의 위기가 닥쳐왔다. 대중들이 록펠러 등 독점세력에게 가지는 증오는 폭동수준이었다. 사회당이나 인민당 등 새로운 정당까지 등장했다. 이에 정치권은 반독점법을 만들고, 독점세력도 록펠러 재단이나 카네기 재단 등을 만들어 부를 어느 정도 환원했다. 모두 잃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그런 긴장의 사회시스템 속에서 그들은 세계를 제패하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이후 상황이 바뀐다. 징병제가 폐지되고 보수세력의 이념전쟁이 승리하면서, 더구나 외부적 긴장세력인 소련이 망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색해진다. 그것은 굳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않아도 지배층이 자기재산과 특권을 빼앗길 위험이 없을 만큼 정교한 법과 제도, 그리고 대중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아프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0만이 넘는 군인 중 미국 의회의원의 아들이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긴장이 없어진 제국은 지금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다른 사례도 있다. 에릭슨을 만들어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발렌베리 가문은 자식들을 전원 사관학교에 보냈다. 더구나 그 가문에는 나치치하에서, 쉰들러리스트의 주인공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며  장렬히 죽은 영웅적인 외교관까지도 배출했다. 더구나 노조대표, 정부와 3자가 합의하여 사회협약을 체결, 스웨덴 사회복지의 한축이 되었다. 자본가들에게 악명 높은 스웨덴의 높은 세금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논란은 많지만 대약진운동 등 엄청난 정책실패에도 중국이 버틴 이유 역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지배 계급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역할이 크다.

한국의 보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꺼내기조차 민망하다. 최근 박정희기념관이 10년만에 모금목표액 500억 중 100억을 모금했다고 한다. 그나마 대기업을 제외한 개인기부는 12억원이다. 사회에 대한 환원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이념과 이익을 위해서도 돈을 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그나마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정운찬 총리의 행태를 보면서는 더더욱 말문이 막힌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천박하거나 자신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도 잃지 않으려다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그들을 긴장시키는 외에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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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밥 즉 쌀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말이다. 우리들의 주식은 쌀이다. 이 땅에서 벼가 언제부터 제배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록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싸리 출현한다. 하지만 유물로만 보면 시작은 매우 오래전부터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충북청원군 옥산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1만1천년전 이상) 볍씨가 발견되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경우도 있다. 아마도 인간이 무리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이땅의 사람들은 쌀을 먹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밥심이 생긴 것이다.

기록으로 보면 삼국사기의 백제본기가 가장 오래되었다. “백제 2대 문루왕이 즉위6년(32년)2월에 명을 내려 처음으로 벼를 심을 도전(벼논)을 만들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적극적인 식량생산을 위해 왕이 직접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밭작물만 재배한 고구려 사람들은 쌀을 먹지 못했다.


쌀은 국력이었다.

쌀은 귀하다 보니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세종때만해도 400여만 석의 쌀을 생산했다. 당시 인구가 6백만 정도 였으니 상당한 양이다. 이중 상당부분을 비축하고 여진과 일본에 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평화라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쌀이 곧 국력이었던 셈이다.

이러던 쌀은 조선시대 개항이후로는 큰 분쟁의 씨앗이 된다. 조선의 경제를 잠식한 일본은 1891년 한해만도 전체 생산량의 3분의1인 94만석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따라서 쌀값이 폭등했다. 그래서 쌀을 사기위해 당시 일본인이 만든 전당포에 옷과 물건을 맡기고 돈을 구어야했다. 결국 그 고리대로 인해 경제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당황한 조선정부는 쌀 방출을 막는 방곡령을 내려 일본과 충돌하였다.

아무튼 이때 가장 큰 재미를 본 사람은 미곡상이며 정미소 주인인 타운센트였는데 이를 조선사람들이 발음이 잘 되지않자 ‘담손이 방앗간’으로 불렀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정미소이다.

이런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재상이던 이용익은 안남미를 들여왔다. 안남미는 베트남에서 생산된 인디카 계통의 쌀로 우리쌀과 달리 찰기가 부족하다. 더구나 생전처음 외국쌀을 보게된 백성들의 반발은 거셌다. 당시 ‘수입쌀을 먹으면 에비 에미도 몰라 본다’ 등의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백성들은 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했고, 정체성훼손을 우려한 농민들은 격렬한 저항을 했다. 따라서 쌀은 최초의 수입 당부터시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수입되었다. 쌀수입개방문제는 처음부터 중요한 갈등이었던 셈이다.

해방 후에는 미국쌀이 수입되기 시작한다. 차이가 있다면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정치적 압력으로 수입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1969년에는 100만톤의 쌀을 수입되었다. 곡물메이저들이 쌀을 먹는 일본과 한국을 겨냥하여 생산한 켈리포니아산 쌀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밥심 좀 내보자

하지만 소득이 증가하면서 쌀은 계속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을 위해 저곡가 정책을 추진하던 정부는 쌀소비를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결국 혼분식 장려정책으로 5공정권에서는 마침내 쌀소비량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군사정권에서 혼분식장려를 위해 진행한 각종 캠페인이 일제시대에 쌀을 비하하던 내용과 거의 똑같았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쌀을 먹어서 조선사람이 머리가 나쁘다는 캠페인까지 할 정도였다. 산아제한정책과 혼분식 장려정책은 군사정권이 가장 성공한 정책이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저출산과 식랼수입대국이라는 부메랑을 맞았다. 결국 가장 실패한정책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미국정부와 곡물메이저들은 여전히 쌀수입을 강요했다. 그 결과 쌀 재고가 천만석이 넘기도 했다. 그래서 오래 묵은 쌀을 소비하기 위해 영세민과 군인들이 활용되었고, 정부미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온 계기가 된다.

미래학자들은 식량과 에너지가 미래의 분쟁의 핵심이 될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에너지와 달리 식량부족은 우리의 생존 그 자체가 문제로 된다. 그래서 국토가 우리 못지 않게 적은 유럽에서도 자국의 식량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최근 풍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쌀값이 폭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밥심을 주어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밥심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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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년 만의 야간집회

 

“밤11시 종로거리에 화톳불이 밤새 타오르고 있다. 11세 소학교 학생 장용남은 똘망똘망한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연행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 호소는 집회장을 뒤 덮었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시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언뜻 예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장이다. 당시 만민공동회는 실제 1만명 이상이 모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고 일컬었다. 그 시절 서울의 인구가 17만으로 추정되는데, 만민공동회의 참가자 수가 보통 1~2만, 많을 때는 수 만명이 넘었다고 하니 시국위기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소년 장용남의 연설이 있던 ‘화톳불 집회’는 12일간이나 계속될 정도의 열기였다. 거지부터 군인까지 참여하고 돈을 내는 운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가 되었다. 1차 만민공동회 회장은 현덕호라는 쌀장수였다.

1898년은 민비가 시해당한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였다. 하지만 각국의 이권침탈이 자행되었고, 지배층은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혈안에 되어 있던 혼란과 위기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때 신문 등의 다양한 언로를 통해 대중들은 현실문제에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려했던 시기였다. 당시 대부분인 문맹자들을 위하여 신문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업을 이룰 정도로 소통에 대한 대중의 욕구는 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을 비롯한 지배층을 이러한 대중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소통하지도 않은 채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어용 보수단체와의 일부 폭력충돌을 문제삼아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대중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사람사는 사회의 본능

사람은 사회적동물이다. 따라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집회 즉 모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유가 당연한 원리로 인식하는 근대사회에서 이는 의심받지 않는 권리이다.

프랑스에서는 ‘공개집회’라는 집회운동이 있었다. 1868년 합법적으로 집회의 자유를 인정받은 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871년의 파리꼬뮌을 가능하게 한 운동의 한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보수세력이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시작했다. 이후 광장집회의 의미를 느끼게 된 대중들의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이루어지고, 토론이라는 방식으로 집단지성이 형성되어 파리꼬뮌이라는 민중들의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로 생각해보면 광주민주화운동도 비록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금남로의 대중집회를 통해 일시적 자치를 이룬 사례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파리꼬뮌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혼란은커녕 매우 안정된 치안이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억압이 해소되고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대중의 힘은 이렇게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우리 역사에서는 상소제도도 집회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지부상소’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도끼를 들고 가서 왕에게 드리는 상소로 “내 말이 틀리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쳐 달라”며 목숨 걸고 상소한다는 뜻이다. 궁궐 앞에서 일종의 1인 시위를 하면 그 주변에 지지자나 구경꾼이 모이는 공개된 대중집회가 된다.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충선왕 때의 우탁이 선왕의 후궁을 범한 것을 규탄하는 도끼상소의 사례가 있다.

근대에 들어와 대중집회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1893년에 정치개혁과 외세개혁을 요구하던 동학교도들의 보은집회가 있다. 당시 수만명의 동학교도들의 집회는 이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모델이 된 것을 보여진다.

집회의 자유를 허하라

헌법재판소는 오래 전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최소한의 상식에도 기뻐하는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언론출판의 자유가 개인적 자유의 성격을 가진 표현의 자유라면, 집회결사의 자유는 집단적 형태로 행하여지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집회결사의 자유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한 보완적 기능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집회는 의견을 모으고 저항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정당한 후의 결과는 항상 비극이다. 구한말에 만민공동회의 ‘화톳불집회’가 강제해산된 후 그나마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시민사회가 무너지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초래했다. 1백년후 촛불집회 역시 많은 억압의 결과로 개혁도 아닌 후퇴를 막으려는 대중의 요구가 억압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끼상소를 했다 해서 정말로 도끼로 목을 치는 왕이 없었듯이 나를 잡아가라

 

고 집회를 여는 시민들을 잡아가서는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거든 말이라도 하게 해달라. 집회자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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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죽음이 자살이다. 자살은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자살은 그리고 우리 삶과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자살 행위를 묘사했다고 볼 수 있는 장면도 모두 합해서 열다섯 군데에 나온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에서도 자살이 나온다. 이렇듯 자살에 관한 내용은 문학작품과 역사서 전체에 일화 형식으로 산재해 있다.

자살이 문자로 쓰여진 역사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늘 논란이 분분한 행동이다. 물론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윤리적 관습의 틀에 갇힌 금기 행위였다. 사회는 인간에게 스스로 삶을 끝낼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다는 보고는 이제 뉴스거리가 되지도 못하는 것 같다. 보건복지가족부의 조사에 따르면 하루 34명의 한국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이는 2006년에 비해서도 11% 이상 증가한 수치다. 더욱이 20~30대 젊은 남녀의 사망 원인 중 1위가 자살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와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안재환의 경우에도 그가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은 무심코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저 힘들다는 하소연 정도로 받아들이고 시간이 가면 좋아지겠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평소 그렇지 않던 사람이 초조해 보이고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구조적인 문제로도 접근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자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해 정부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자살대책 백서를 펴냈다. 자살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정책 오류를 범했다는 반성이다.

핀란드는 북유럽의 ‘자살대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1980년대 말 전문가가 유족과 1대1 면접을 통해 자살자의 일상생활과 정신치료 내용 등을 조사했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 시행한 끝에 인구 10만 명당 30명이 넘던 자살률을 10년 만에 20명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특히 노인들의 자살은 그 사회 노인복지정책의 ‘건강상태’를 말해주는 지표 중의 하나다.

원래 자살은 처벌의 대상이었다. 자살은 그 집단의 통제와 권위를 벗어나는 유일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8세기경 까지는 자살에 대해 형사처벌을 가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자살기도자를 의학, 심리학으로 도와주려는 시도도 많이 있었다. 자살이 미수에 그친 사람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계몽주의 시대의 의사들은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다양한 치료법을 제안했다. 자살을 기도했던 자들은 이제 처벌 대상이 아니라 치료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자살이 개인적인 특이한 문제가 아니라 질병으로 인식되는 것이 발전이라면 사회적인 원인은 좀 더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원인에는 경제적 문제가 중요할 것이다. 경제적 자살은 타살이라는 말이 있다. 갈수록 양극화와 경제적 고통이 심해지는 지금의 현실을 계속 방치한다면 우리사회는 ‘자살 권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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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종교분쟁과 우리의 차이
   

우리인식에 유럽은 ‘똘레랑스’ 즉 ‘관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종교분쟁이 상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몇 건의 커다란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단연 중요한 계기는 30년 전쟁이다.

독일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30년 동안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그 규모도 유럽 최대였다. 그런데 이 전쟁은 독일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30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개입된 최초의 국제전쟁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종교개혁가 후스의 고향이었던 보헤미아(지금 체코의 서부이다)에서 일어난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었다. 1617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니난드 2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신교도 예배를 중지하는 법을 공표하자 이에 반발한 신교도들이 궁을 습격해 고관 2명을 창문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죽지 않고 도망쳤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우발적 사건이 스웨덴과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 전 유럽이 참여하는 30년간의 전쟁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터였던 독일 지역은 국토의 5분의 4가 황폐해지고 1천600만명이던 인구도 약탈과 학살, 기근과 역병 속에서 600만으로 줄었다. 이런 결과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유럽에서는 신교든 가톨릭이든 종교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베스트팔렌조약(1648)으로 나타났다. ‘모든 군주는 자기 백성이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조약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을 바친 이후에야 종교적 집착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와진 것이다. 그 후 유럽의 다자간 정치질서를 ‘베스트팔렌체제’라고 한다.

전쟁의 최종결과는 신교도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가톨릭에 대한 보복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공존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가톨릭 국가였지만 경쟁국가 스페인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신교도를 지원한 프랑스의 역할이 컸고, 프랑스는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이때 독립을 공인받았고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위스의 중립은 그들의 노력도 있지만 엄청난 피를 본 유럽인들의 교훈 때문이었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일어난 마지막 종교전쟁이 되었고, 자유로운 국가들의 공동체로서의 유럽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져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시에 힘을 모으게 되어, 종교를 앞세운 전 세계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불행도 동시에 찾아왔다.

동양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종교분쟁이 거의 없었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 종교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전쟁은 누구에게도 이득을 주지 못하고 공동체의 황폐화만 가져온다. 물론 정치적인 이득을 보는 소수가 있을 것이다. 직선적인 역사관만큼이나 꼭 피를 보아야만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화도 안 된 사람들 때문인지 혹은 스스로를 서구인처럼 생각하여 타종교인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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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접어든 현대사회에서도 이름뿐인 존재이지만 왕이 있다. 또한 대부분의 나라에는 왕이 있거나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가 존재해왔다. 비록 직접통치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에서도 왕정폐지론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왕실들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존경받는 건강한 보수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상징하면서 가장 존경받는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국왕이나 문제는 많지만 품위를 지키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표적인 왕들이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다. 비록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자칭 ‘새로운 우익’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분명히 수천년을 이어온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후손인 영친왕 이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광복 후 18년이나 지난 1963년 귀국한다. 해방이 되고서도 귀국하지 못했던 것은 이승만 때문이다. 명분은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이었지만, 이면에는 이 씨 양녕대군파인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을 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화폐인물이 모두 이 씨라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아무튼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영친왕을 귀국시킨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를 신기한 사람으로 바라보았을 뿐 관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것은 탄압이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조선의 왕족들이 자초한 것이다.

의친왕 이강(李堈) 정도가 일제에 비협조의 저항 했을 뿐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제에 순응했다. 더구나 지배층을 형성하던 양반층에서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수가 일제에 협조했다. 신기한 것은 800명의 군대 대부분은 의병이 되거나 낙향하여 교육사업 등을 벌여 저항했으나 4천200여명의 중앙관료들과 경찰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에 부역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한일 합방을 한 다음날 1천700만원의 은사금을 각 지방의 양반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때 쌀 한섬이 3원이었으니 지금 시세로도 1조에 육박하고, 당시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을 다 사고도 남을 정도의 규모였다. 조선의 지배층이 돈을 받고 나라를 판 것이다.

또한 1910년 10월 76명의 양반이 후작, 자작, 남작으로 구성된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을 받았다. 한마디로 매국노들에게 일본귀족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이중 민영환이 자살로서 항의하는 등 13명이 거절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감읍해 했다. 당시 친일파 귀족들이 수령한 은사금은 모두 605만엔으로,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3천6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이완용은 당시 15만엔을 은사금으로 받았는데, 금값을 기준으로 현재의 30억원에 해당한다. 특히 총리 대신에 오른 직후인 1907∼1910년 전국에 걸쳐 15건의 재산증식이 이뤄졌다.

이러니 우리나라에만 왕당파가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혁명 등의 역사적 단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역할을 포기한 나머지 대중들에게 잊혀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조상이 명문집안이었다고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조상님들은 얼마에 나라를 팔았소?”   

 

 

* 이 글은 2008년 8월 25일 시민사회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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