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 신앙으로 무장하고 낮은세율로 제국을 건설하다 

 

이슬람의 사회개혁

혼란의 시대에는 종교가 등장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종교는 처음에는 사회혁명적인 주장으로 소외받는 대중들에게 파고 들고, 공동체를 만든다. 비록 주술에 의존한다 할지라도 그 너머에는 비록 비현실적이라 하더라도 기독교의 천년왕국설처럼, 현실의 고통을 극복하는 내용이 포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체제가 만들어지고 권력이 생기면 초기의 사회혁명적인 요소를 부정하고 체제유지의 도구가 되고 만다. 종말론을 주장했던 많은 종교가 그렇게 현실의 권력이 되었다.

 

가장 빠른 시간동안 제국을 형성한 이슬람은 이러한 종교의 정치학을 가장 강력하게 구현한 종교일 것이다. 마호멧은 처음에 신자들사이의 보편을 주장하며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주었다. 부자들도 자선을 베푸는 조건으로 포용했다. 여성에게도 적지않은 호소력이 있었다. 여성보다 우월한(혹은 하다면) 남성이 여성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고 설교했으며 재산권도 허용했다.

 

종교를 창업한 사람이 직접 제국을 건설한 사례는 흔치않다. 특히 그 사후에 역동적 힘을 발휘한 경우는 더더욱 찾아보기 힘들다. 마호멧은 그런 대표적인 선지자 이자 지도자이다. 순수하게 종교적인 측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신화나 종교관행과 커다란 차이는 없다. 가장 큰 차이는 그의 설교는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강령이었다는 점이다. 끊임없이 무력 충돌이 일어나는 당시 ‘야만사회’를 질서 있는 ‘움마공동체’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따라서 이슬람에 있어서 확장전쟁은 어쩌면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신앙과 낮은 세율로 제국을 건설

 630년 메카를 점령한 후 2년후 사망한다. 하지만 그의 강력한 메시지를 이어받은 후계자들은 정복전쟁을 계속한다. 그리고 642년에는 이집트까지 정복함으로서 20년 만에 이집트에서 시리아, 페르시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다.

 

이들의 성공은 사막의 ‘말’인 낙타를 이용한 전투력에 있기도 했다. 하지만 보다 결정적인 것은 비잔틴이나, 페르시아 등 낡은 제국들에게서 마음이 떠나 있던 사람들을 사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이슬람 지배자들은 새로운 국가구조를 만들지도 않았고, 개종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신앙을 존중했다. 단지 세금을 정기적으로 납부하라고 요구했고, 저항한 귀족들의 토지와 국가소유의 토지를 압류했을 뿐이었다. 따라서 유대인 페르시아인, 기독교인, 조로아스터인 등 주민대다수는 훨씬 나은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는 유대인 작가는 ‘조물주는 인간을 악에서 구하시려고 이스마엘(아랍)왕국을 주셨다’고 찬양할 정도였다.

 

당시 아랍인들은 종교세로 소득의 2.5%를 내는 것 외에는 세금이 없었다. 다만 국유지를 빌려주는 경우에는 10%의 세금을 받았다. 비이슬람인들에게는 이전에 비쟌틴에 내던 세금을 그대로 받았으나, 공정하고 정확했기 때문에 불만은 적었다. 더구나 종교의 자유를 인정받고 개종도 자유로왔다.

 

이렇게 신앙으로 무장하고 낮은세율로 침략하는 이슬람세력을 사치와 착취에 기반한 거대 제국들이 이겨낼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백년이 채 되지않아 이들은 서로는 프랑스부터 동으로는 인더스강까지, 북으로는 탈라스에서 당나라와 충돌하게 된다.

 

강압도 없는데 개종하면 세금을 적게 낸다는 것은 이슬람의 확산에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개종을 하게 되었고 비아랍계 무슬림(이슬람교도)이 제국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다수가 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들 개종자들을 ‘마왈리’라고 부른다.

 

초기의 정신을 잃고 제국도 잃는다.

 초기에 아랍인들은 종교를 설파하는 성전이라는 명분으로 제국을 건설했다. 하지만 정복이 정체되고 새로운 개종자들이 평등을 요구하자 돌변했다. 마왈리들을 차별하고 특권을 배제한 것이다. 결국 그들의 평등한 공동체는 아랍인의 공동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장점이었던 공동체의 신앙이 생명력을 잃게 되면서 제국은 정체되고 급속한 혼란이 오게 된다. 초기의 종교적 신심은 제국이 건설되고 권력이 생기자 방어하는 종교적 논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한마디로 코미디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종교를 확장시키려고 성전을 벌여놓고는 개종하지말라고 협박하는 상황인 것이다.

 

초기 시아파와 수니파의 시작은 이러한 갈등구조에서 시작되었다 정통 마호멧의 후계자인 알리를 추종하는 시아파는 오히려 아랍부족이 아닌 폐르시아 등 타 부족 출신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슬람화된 사회에서 초기 공동체의 이상을 가지고 천년왕국의 검은 깃발을 내세운 것이다. 실제로 이들을 기반으로 아바스 왕조가 건설되기도 했다.

 

아무튼 아랍인들은 초기의 열정이 식고, 무슬림이 무조건 많아지는 것이 자신들에게 좋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자 개종을 권하지 않을 뿐아니라, 오히려 말리고 억압하기까지 했다. 세입감소를 우려하여 농촌으로 쫒아버리기까지 했다. 아랍여인과의 결혼은 꿈도 꿀수 없었다.

 

이들이 평등한 공동체라는 종교적인 원칙까지 무시하면서 마왈리들을 탄압했던 것은 당시 이슬람을 지배한 우마이야 왕조가 소수의 아랍인이 세금을 내는 다수의 비무슬림을 지배한다는 전제위에 성립되어 있었던 것이다. 마왈리에게 동등권을 부여한다는 것은 곧 세입의 감소와 세출의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구조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록 마왈리와 아랍인의 구분이 인종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반드시 그렇지 않았다. 아랍인을 의미하는 디완(인명부, 연금대상자)에 등록되지않는 아랍하류층도 사실상 마왈리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이러한 노력을 하더라도 이들 개종자들인 마왈리들은 이미 군대의 다수를 이루고 있었고, 정치적으로 ‘알리의 당,’운동 등 세로운 세력을 형성하면서 마침내 아랍인이 지배하는 이슬람제국은 무너지고 분열하게 된다.

 

따라서 이슬람의 팽창은 당분간 멈추게 되고 각 민족들은 특유의 이슬람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이것이 이슬람이 아랍을 벗어나는 세계종교가 된 이유이고, 동시에 아랍인들이 미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만들어내지 못한 세계제국의 이유가 된다. 제국을 원하거든 제국을 이룬 이유를 알아야 하고 지켜내야 하지 않을까.

 

 

 

참고도서

김정위, <중동사>, 대한교과서. 1987

버나드 루이스, 김호동 역, <이슬람 1400년>, 까치. 1994

정수일. <이슬람문명>, 창작과비평사. 2002

진원숙. <충돌의 역사>, 신서원.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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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은 문명성찰의 기회
 
 
우리 인류역사에서 인구가 감소한 경우가 많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원인을 들라면 우선은 전쟁이나 자연재해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제일 큰 원인은 뜻밖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염병이다. 그나마 전쟁에서도 직접 전투 중에 사망한 경우보다 전염병으로 죽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전투에서는 대개 사망자보다 부상자나 포로가 많다.

가장 유명한 전염병은 흑사병이다. 흑사병은 페스트(pestis)라고도 한다. 증상으로 피부 밑에 검은 피물집이 생기기 때문에 흑사병이라 했다. 흑사병은 역사상 단 한번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주기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했다. 흑사병에 따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한다. 가장 커다란 피해가 발생한 것은 1348년에 시작된 흑사병이다. 자그마치 50여 년 동안 전유럽 인구의 3분의 1인 2천500만여 명이 사망했다. 유럽은 200년이 지난 1348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인구를 회복한다. 이후 흑사병이 다시 유행한 것은 1894년 중국의 광둥에서였다. 이 후 20년간 전세계에서 1천만 명이 사망했다.

 


흑사병의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몽고족 유포설이다. 1347년 몽골 징기스칸의 후예인 킵차크칸국의 군대가 크림반도에 있었던 제노바의 교역소를 공격했다. 그때 몽고족이 페스트 환자의 시체를 대포로 쏘아보냈고, 페스트에 감염된 제노바인들로 인해 유럽에 페스트가 퍼졌다는 주장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사실로 믿는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것은 재앙의 원인을 외부에 전가하려는 심리속에서 나온 것이다. 더구나 다른 인종 특히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맞물려서 만들어진 허구이다. 왜냐하면 이전에도 유럽에는 흑사병이 유행했던 적이 있었고, 몽골 전래설을 증명할 직접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당시 중국도 페스트로 1340년에 엄청난 피해가 있었다. 강남 어느 한 성(城)의 주민 90%가 사망하는 재앙도 있었다. 이런 상황이 원인이 되어 몽골제국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28년 뒤 몽골제국은 붕괴했다. 몽골 역시 흑사병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흑사병의 직접적인 원인은 인구증가 때문이 아니다. 기근과 영양결핍 그리고 불량한 위생환경이 주된 이유이다. 따라서 구조적인 문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질병으로 볼 수도 있다. 당시 사망자는 대부분 영양이 부족하고 비위생적인 생활조건에 있던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부자들의 사망률은 매우 낮았다. 부자들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서 흑사병이 지나간 집에 실험적으로 거주하게 했다. 전염병의 재앙 속에서도 계급성을 볼 수 있는 사례다.

전염병 피해의 대표적인 사례는 아메리카 대륙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때 아메리카에는 구대륙에 못지않은 많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었다. 아메리카에는 이미 2천만 명이 넘는 원주민이 살고 있었다. 그러면 그 많은 아메리카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한 후 200년 안에 95%의 아메리카인들이 사망했다. 그들은 전쟁으로 죽은 것이 아니었다. 유럽에서 전해온 천연두를 비롯한 수십 가지의 전염병으로 인해 유럽의 군대가 쳐들어오기 전에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유럽이 아메리카에 준 축복은 복음이 아니라 ‘전염병’이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전염병은 이런 몰살 때문에 노동력이 부족했고 흑인노예들을 수입해야했다.

당시 아메리카에는 가축이 단 5종에 불과했다. 칠면조, 라마, 기니피그, 사향물오리, 개가 전부였다. 소규모였고 인간과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전염병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유럽인의 출현과 그들의 선물인 세균은 면역력이 없었던 이들을 순식간에 멸망시켜버린다. 코르테즈가 600명으로 2천만의 아즈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피사로가 168명으로 수천만의 잉카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숨어 있는 이유이다.

최근 사스와 광우병, 조류독감에 이어 신종인플루엔자가 유행하고 있다. 전염병은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없는 영원한 숙제다. 교통의 발달로 순식간에 전세계에 영향을 준다. 더구나 유전자 조작까지 하면서 위험요인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이제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언제든지 아메리카 원주민처럼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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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이 만든 ‘노블리스 오블리제’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라는 뜻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제국을 이룬 그들 상류사회의 높은 도덕률로 알고 있다. 그래서 그들의 모범이 제국을 이루었으리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종합적인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 사전적 정의를 보면 ‘노블리스’는 고귀한 프랑스의 귀족사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오블리제’는 강요하다, 어쩔수 없이 무엇을 하게하다, 억지로 시키다, 의무를 지우다, 고맙게 여기게 하다 등으로 의무가 자발적인 것 이상임을 말해준다.

우선 로마를 보자. 보통 어떤 나라든 성장을 이루고 내부문제가 폭발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마는 반대였다. 고대로마는 초기에 왕정이었다. 나머지는 시민으로 파트리키(귀족)와 플레브스(평민)으로 구별했다. 이미 도시국가 시절에 공화정을 수립하고, 이후에는 양계급간에 격렬한 신분투쟁이 벌어지는데 그 절정은 BC 494년의 ‘성산사건’(聖山事件)이다. 평민들이 성산을 점거하고 협상을 요구한 것이다. 이때 지도자로 호민관이라는 직책을 만들었다. 호민관에게는 원로원의 결의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을 만들게 한 '칼레의 시민' - 로뎅의 조각상>



이후에도 로마는 귀족계급이 귀족주의적인 공화정을 유지하기 위해서 솔선수범하여 자신들의 존재 필요성을 인정받기위해 결단을 내린다. 지금으로 보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스스로에게 강요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긴장관계 속에서 형성된 공동체의 에너지가 맹목적인 지배국가인 다른 나라를 압도하게 되어 세계제국을 건설한다.

이와 비슷한 사례는 그리스의 스파르타가 있는데, 그들은 압도적 다수의 헬롯(노예)폭동을 막기 위해 혹독한 훈련을 전자유민(사실상 귀족이다)에게 강요했다. 차이가 있다면 스파르타는 수동적이고 폭력적이라면, 로마는 적극적이고 고도화되었다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는 도시국가와 제국의 차이로 나타났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사회봉사나 헌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특권층을 위한 이데올로기로, 사회적 특권과 부를 누리는 사람들이 서로 뭉쳐 자신의 이익을 스스로 지킨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사회적 긴장과 시스템이 그것을 이끌어낸 것이다.

어느 국가나 어느 정도의 정치적 긴장 속에서 대국이 된다. 비슷한 사례로 몽골이 있다. 제국의 팽창기에 그들은 어떤 권력자도 법 앞에 평등한 원칙을 실현했다. 또한 모든 전리품도 나누었다. 지배자는 대신 명예와 존경을 원했다.

미국의 경우에도 19세기에 남북전쟁 등으로 생산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엄청난 경제력 집중으로 인해 국가의 위기가 닥쳐왔다. 대중들이 록펠러 등 독점세력에게 가지는 증오는 폭동수준이었다. 사회당이나 인민당 등 새로운 정당까지 등장했다. 이에 정치권은 반독점법을 만들고, 독점세력도 록펠러 재단이나 카네기 재단 등을 만들어 부를 어느 정도 환원했다. 모두 잃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던 셈이다.

그런 긴장의 사회시스템 속에서 그들은 세계를 제패하게 된다. 하지만 베트남전쟁 이후 상황이 바뀐다. 징병제가 폐지되고 보수세력의 이념전쟁이 승리하면서, 더구나 외부적 긴장세력인 소련이 망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무색해진다. 그것은 굳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지 않아도 지배층이 자기재산과 특권을 빼앗길 위험이 없을 만큼 정교한 법과 제도, 그리고 대중이 무기력하기 때문이다. 아프간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10만이 넘는 군인 중 미국 의회의원의 아들이 한명도 없었다고 한다. 긴장이 없어진 제국은 지금 급속히 쇠퇴하고 있다.

다른 사례도 있다. 에릭슨을 만들어 스웨덴 국내총생산(GDP)의 30%를 차지하는 발렌베리 가문은 자식들을 전원 사관학교에 보냈다. 더구나 그 가문에는 나치치하에서, 쉰들러리스트의 주인공보다 더 많은 공을 세우며  장렬히 죽은 영웅적인 외교관까지도 배출했다. 더구나 노조대표, 정부와 3자가 합의하여 사회협약을 체결, 스웨덴 사회복지의 한축이 되었다. 자본가들에게 악명 높은 스웨덴의 높은 세금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논란은 많지만 대약진운동 등 엄청난 정책실패에도 중국이 버틴 이유 역시 모택동과 주은래 등 지배 계급의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역할이 크다.

한국의 보수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꺼내기조차 민망하다. 최근 박정희기념관이 10년만에 모금목표액 500억 중 100억을 모금했다고 한다. 그나마 대기업을 제외한 개인기부는 12억원이다. 사회에 대한 환원은 고사하고 자신들의 이념과 이익을 위해서도 돈을 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그나마 다를 것이라 생각했던 정운찬 총리의 행태를 보면서는 더더욱 말문이 막힌다.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천박하거나 자신있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도 잃지 않으려다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을텐데 말이다. 그들에게는 항상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닐까? 결국 그들을 긴장시키는 외에는 방법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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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산다

 

‘한국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에게 밥 즉 쌀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주 적절하게 표현해 주는 말이다. 우리들의 주식은 쌀이다. 이 땅에서 벼가 언제부터 제배되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기록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싸리 출현한다. 하지만 유물로만 보면 시작은 매우 오래전부터로 추정된다. 예를 들면 충북청원군 옥산면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1만1천년전 이상) 볍씨가 발견되어 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킨 경우도 있다. 아마도 인간이 무리생활을 하게 되면서부터는 이땅의 사람들은 쌀을 먹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때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밥심이 생긴 것이다.

기록으로 보면 삼국사기의 백제본기가 가장 오래되었다. “백제 2대 문루왕이 즉위6년(32년)2월에 명을 내려 처음으로 벼를 심을 도전(벼논)을 만들게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적극적인 식량생산을 위해 왕이 직접 나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밭작물만 재배한 고구려 사람들은 쌀을 먹지 못했다.


쌀은 국력이었다.

쌀은 귀하다 보니 화폐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지존의 자리에 오른 것은 조선시대부터이다. 세종때만해도 400여만 석의 쌀을 생산했다. 당시 인구가 6백만 정도 였으니 상당한 양이다. 이중 상당부분을 비축하고 여진과 일본에 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평화라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동북아시아에서 쌀이 곧 국력이었던 셈이다.

이러던 쌀은 조선시대 개항이후로는 큰 분쟁의 씨앗이 된다. 조선의 경제를 잠식한 일본은 1891년 한해만도 전체 생산량의 3분의1인 94만석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었다. 따라서 쌀값이 폭등했다. 그래서 쌀을 사기위해 당시 일본인이 만든 전당포에 옷과 물건을 맡기고 돈을 구어야했다. 결국 그 고리대로 인해 경제는 대혼란에 휩싸였다. 당황한 조선정부는 쌀 방출을 막는 방곡령을 내려 일본과 충돌하였다.

아무튼 이때 가장 큰 재미를 본 사람은 미곡상이며 정미소 주인인 타운센트였는데 이를 조선사람들이 발음이 잘 되지않자 ‘담손이 방앗간’으로 불렀고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정미소이다.

이런 식량난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재상이던 이용익은 안남미를 들여왔다. 안남미는 베트남에서 생산된 인디카 계통의 쌀로 우리쌀과 달리 찰기가 부족하다. 더구나 생전처음 외국쌀을 보게된 백성들의 반발은 거셌다. 당시 ‘수입쌀을 먹으면 에비 에미도 몰라 본다’ 등의 유언비어가 돌기도 했다. 백성들은 혼을 빼앗긴다고 생각했고, 정체성훼손을 우려한 농민들은 격렬한 저항을 했다. 따라서 쌀은 최초의 수입 당부터시 군대의 경호를 받으며 수입되었다. 쌀수입개방문제는 처음부터 중요한 갈등이었던 셈이다.

해방 후에는 미국쌀이 수입되기 시작한다. 차이가 있다면 필요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정치적 압력으로 수입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1969년에는 100만톤의 쌀을 수입되었다. 곡물메이저들이 쌀을 먹는 일본과 한국을 겨냥하여 생산한 켈리포니아산 쌀이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밥심 좀 내보자

하지만 소득이 증가하면서 쌀은 계속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 안정을 위해 저곡가 정책을 추진하던 정부는 쌀소비를 줄이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 결국 혼분식 장려정책으로 5공정권에서는 마침내 쌀소비량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것은 군사정권에서 혼분식장려를 위해 진행한 각종 캠페인이 일제시대에 쌀을 비하하던 내용과 거의 똑같았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쌀을 먹어서 조선사람이 머리가 나쁘다는 캠페인까지 할 정도였다. 산아제한정책과 혼분식 장려정책은 군사정권이 가장 성공한 정책이다. 하지만 그 결과 우리는 저출산과 식랼수입대국이라는 부메랑을 맞았다. 결국 가장 실패한정책이 되는 셈이다.

하지만 미국정부와 곡물메이저들은 여전히 쌀수입을 강요했다. 그 결과 쌀 재고가 천만석이 넘기도 했다. 그래서 오래 묵은 쌀을 소비하기 위해 영세민과 군인들이 활용되었고, 정부미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인식을 가져온 계기가 된다.

미래학자들은 식량과 에너지가 미래의 분쟁의 핵심이 될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에너지와 달리 식량부족은 우리의 생존 그 자체가 문제로 된다. 그래서 국토가 우리 못지 않게 적은 유럽에서도 자국의 식량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최근 풍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쌀값이 폭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밥심을 주어야한다. 그래야 우리의 밥심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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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백년 만의 야간집회

 

“밤11시 종로거리에 화톳불이 밤새 타오르고 있다. 11세 소학교 학생 장용남은 똘망똘망한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면서 연행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 호소는 집회장을 뒤 덮었고 지켜보던 사람들은 일시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언뜻 예전 촛불집회를 연상시키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 상황은 지금으로부터 100여년 전인 1898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장이다. 당시 만민공동회는 실제 1만명 이상이 모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라고 일컬었다. 그 시절 서울의 인구가 17만으로 추정되는데, 만민공동회의 참가자 수가 보통 1~2만, 많을 때는 수 만명이 넘었다고 하니 시국위기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실제로 소년 장용남의 연설이 있던 ‘화톳불 집회’는 12일간이나 계속될 정도의 열기였다. 거지부터 군인까지 참여하고 돈을 내는 운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종로는 조선의 아크로폴리스가 되었다. 1차 만민공동회 회장은 현덕호라는 쌀장수였다.

1898년은 민비가 시해당한 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경운궁으로 환궁하고 대한제국을 선포한 직후였다. 하지만 각국의 이권침탈이 자행되었고, 지배층은 자신의 이익 챙기기에 혈안에 되어 있던 혼란과 위기의 시대였다.

하지만 그때 신문 등의 다양한 언로를 통해 대중들은 현실문제에 급격하게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려했던 시기였다. 당시 대부분인 문맹자들을 위하여 신문을 읽어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이 업을 이룰 정도로 소통에 대한 대중의 욕구는 끓어 넘치고 있었다.

그러나 고종을 비롯한 지배층을 이러한 대중의 개혁요구를 받아들이기는커녕 소통하지도 않은 채 질서 유지라는 명목으로 어용 보수단체와의 일부 폭력충돌을 문제삼아 독립협회를 해산하고 대중들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사람사는 사회의 본능

사람은 사회적동물이다. 따라서 사람은 본능적으로 집회 즉 모임을 추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자유가 당연한 원리로 인식하는 근대사회에서 이는 의심받지 않는 권리이다.

프랑스에서는 ‘공개집회’라는 집회운동이 있었다. 1868년 합법적으로 집회의 자유를 인정받은 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1871년의 파리꼬뮌을 가능하게 한 운동의 한 방식이었다. 처음에는 보수세력이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시작했다. 이후 광장집회의 의미를 느끼게 된 대중들의 참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게 된다.

여기에서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까지 이루어지고, 토론이라는 방식으로 집단지성이 형성되어 파리꼬뮌이라는 민중들의 자치정부를 구성하는 원동력이 된다. 우리로 생각해보면 광주민주화운동도 비록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지만 금남로의 대중집회를 통해 일시적 자치를 이룬 사례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파리꼬뮌과 광주민주화운동 당시에 혼란은커녕 매우 안정된 치안이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억압이 해소되고 신뢰가 형성되어 있는 대중의 힘은 이렇게 놀라운 능력을 보여준다.

우리 역사에서는 상소제도도 집회방식으로 활용되었다. ‘지부상소’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도끼를 들고 가서 왕에게 드리는 상소로 “내 말이 틀리다면 도끼로 내 머리를 쳐 달라”며 목숨 걸고 상소한다는 뜻이다. 궁궐 앞에서 일종의 1인 시위를 하면 그 주변에 지지자나 구경꾼이 모이는 공개된 대중집회가 된다.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 충선왕 때의 우탁이 선왕의 후궁을 범한 것을 규탄하는 도끼상소의 사례가 있다.

근대에 들어와 대중집회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1893년에 정치개혁과 외세개혁을 요구하던 동학교도들의 보은집회가 있다. 당시 수만명의 동학교도들의 집회는 이후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의 모델이 된 것을 보여진다.

집회의 자유를 허하라

헌법재판소는 오래 전야간 옥외집회를 금지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최소한의 상식에도 기뻐하는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반가운 소식이다. 언론출판의 자유가 개인적 자유의 성격을 가진 표현의 자유라면, 집회결사의 자유는 집단적 형태로 행하여지는 넓은 의미에서의 표현의 자유를 말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집회결사의 자유는 언론출판의 자유에 대한 보완적 기능을 한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실 집회는 의견을 모으고 저항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부정당한 후의 결과는 항상 비극이다. 구한말에 만민공동회의 ‘화톳불집회’가 강제해산된 후 그나마 조금씩 형성되기 시작한 시민사회가 무너지고,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비극을 초래했다. 1백년후 촛불집회 역시 많은 억압의 결과로 개혁도 아닌 후퇴를 막으려는 대중의 요구가 억압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도끼상소를 했다 해서 정말로 도끼로 목을 치는 왕이 없었듯이 나를 잡아가라

 

고 집회를 여는 시민들을 잡아가서는 우리의 미래는 암울하다. 말을 들어주지 않으려거든 말이라도 하게 해달라. 집회자유를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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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죽음이 자살이다. 자살은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방법으로써 자기 자신을 위한 행동이다. 자살은 그리고 우리 삶과 역사와 함께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신약과 구약을 통틀어 자살 행위를 묘사했다고 볼 수 있는 장면도 모두 합해서 열다섯 군데에 나온다.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기록에서도 자살이 나온다. 이렇듯 자살에 관한 내용은 문학작품과 역사서 전체에 일화 형식으로 산재해 있다.

자살이 문자로 쓰여진 역사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늘 논란이 분분한 행동이다. 물론 세계 어느 문화권에서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윤리적 관습의 틀에 갇힌 금기 행위였다. 사회는 인간에게 스스로 삶을 끝낼 수 있는 자유로운 권리를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이 높다는 보고는 이제 뉴스거리가 되지도 못하는 것 같다. 보건복지가족부의 조사에 따르면 하루 34명의 한국인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고 한다. 이는 2006년에 비해서도 11% 이상 증가한 수치다. 더욱이 20~30대 젊은 남녀의 사망 원인 중 1위가 자살이라니 그저 놀라울 뿐이다.

모든 사회적인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와 구조적인 문제가 있다. 안재환의 경우에도 그가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하지만 가족이나 주변사람들은 무심코 넘기는 경우가 많다. 그저 힘들다는 하소연 정도로 받아들이고 시간이 가면 좋아지겠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평소 그렇지 않던 사람이 초조해 보이고 죽고 싶다는 말을 한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것이 현명한 방법이다.

구조적인 문제로도 접근하는 것이 최근의 경향이다. 자살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다. 일본 내각부가 지난해 정부 차원에서는 처음으로 자살대책 백서를 펴냈다. 자살문제를 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하지 않고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정책 오류를 범했다는 반성이다.

핀란드는 북유럽의 ‘자살대국’이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1980년대 말 전문가가 유족과 1대1 면접을 통해 자살자의 일상생활과 정신치료 내용 등을 조사했다. 이런 자료를 바탕으로 자살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 시행한 끝에 인구 10만 명당 30명이 넘던 자살률을 10년 만에 20명 수준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특히 노인들의 자살은 그 사회 노인복지정책의 ‘건강상태’를 말해주는 지표 중의 하나다.

원래 자살은 처벌의 대상이었다. 자살은 그 집단의 통제와 권위를 벗어나는 유일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8세기경 까지는 자살에 대해 형사처벌을 가했다. 하지만 이후에는 자살기도자를 의학, 심리학으로 도와주려는 시도도 많이 있었다. 자살이 미수에 그친 사람은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계몽주의 시대의 의사들은 우울증을 치료하는데 다양한 치료법을 제안했다. 자살을 기도했던 자들은 이제 처벌 대상이 아니라 치료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자살이 개인적인 특이한 문제가 아니라 질병으로 인식되는 것이 발전이라면 사회적인 원인은 좀 더 이 문제에 대한 적극적인 해결책이 될 것이다. 사회적인 원인에는 경제적 문제가 중요할 것이다. 경제적 자살은 타살이라는 말이 있다. 갈수록 양극화와 경제적 고통이 심해지는 지금의 현실을 계속 방치한다면 우리사회는 ‘자살 권하는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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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종교분쟁과 우리의 차이
   

우리인식에 유럽은 ‘똘레랑스’ 즉 ‘관용’으로 인식되고 있다. 따라서 종교분쟁이 상상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 몇 건의 커다란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단연 중요한 계기는 30년 전쟁이다.

독일에서 일어난 30년 전쟁은 1618년부터 30년 동안 독일을 무대로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간에 벌어진 종교전쟁이다. 그 규모도 유럽 최대였다. 그런데 이 전쟁은 독일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 아니다. 300여개의 크고 작은 나라들이 개입된 최초의 국제전쟁이었다.

 


사건의 발단은 종교개혁가 후스의 고향이었던 보헤미아(지금 체코의 서부이다)에서 일어난 ‘프라하 창문 투척사건’이었다. 1617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페르니난드 2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신교도 예배를 중지하는 법을 공표하자 이에 반발한 신교도들이 궁을 습격해 고관 2명을 창문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그들은 죽지 않고 도망쳤다. 하지만 아무도 이런 우발적 사건이 스웨덴과 에스파냐, 영국, 프랑스 등 전 유럽이 참여하는 30년간의 전쟁이 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전쟁의 결과는 참혹했다. 전쟁터였던 독일 지역은 국토의 5분의 4가 황폐해지고 1천600만명이던 인구도 약탈과 학살, 기근과 역병 속에서 600만으로 줄었다. 이런 결과 이 전쟁을 마지막으로 유럽에서는 신교든 가톨릭이든 종교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전쟁의 결과는 베스트팔렌조약(1648)으로 나타났다. ‘모든 군주는 자기 백성이 종교를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는 문구가 조약이 나타내고자 하는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생명을 바친 이후에야 종교적 집착에서 다소나마 자유로와진 것이다. 그 후 유럽의 다자간 정치질서를 ‘베스트팔렌체제’라고 한다.

전쟁의 최종결과는 신교도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가톨릭에 대한 보복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공존을 인정한 것이다. 특히 가톨릭 국가였지만 경쟁국가 스페인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신교도를 지원한 프랑스의 역할이 컸고, 프랑스는 패권을 차지하게 된다. 또한 네덜란드와 스위스가 이때 독립을 공인받았고 중립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스위스의 중립은 그들의 노력도 있지만 엄청난 피를 본 유럽인들의 교훈 때문이었다.

30년 전쟁은 유럽에서 일어난 마지막 종교전쟁이 되었고, 자유로운 국가들의 공동체로서의 유럽이라는 합의가 이루어져 근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동시에 힘을 모으게 되어, 종교를 앞세운 전 세계 식민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불행도 동시에 찾아왔다.

동양의 경우에는 문화적인 특성 때문에 역사적으로 종교분쟁이 거의 없었다. 종교가 사회를 지배한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우리나라에 종교분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다.

전쟁은 누구에게도 이득을 주지 못하고 공동체의 황폐화만 가져온다. 물론 정치적인 이득을 보는 소수가 있을 것이다. 직선적인 역사관만큼이나 꼭 피를 보아야만 교훈을 얻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근대화도 안 된 사람들 때문인지 혹은 스스로를 서구인처럼 생각하여 타종교인을 타자화시키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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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접어든 현대사회에서도 이름뿐인 존재이지만 왕이 있다. 또한 대부분의 나라에는 왕이 있거나 왕을 지지하는 왕당파가 존재해왔다. 비록 직접통치까지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유럽에서도 왕정폐지론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왕실들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이유도 있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존경받는 건강한 보수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민주화의 상징하면서 가장 존경받는 것으로 알려진 스페인의 후안 카를로스국왕이나 문제는 많지만 품위를 지키는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표적인 왕들이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다. 비록 그 자체를 부정하는 자칭 ‘새로운 우익’들이 정권을 잡았지만 분명히 수천년을 이어온 역사가 있다. 그리고 그 후손인 영친왕 이은이 있었다. 하지만 그는 광복 후 18년이나 지난 1963년 귀국한다. 해방이 되고서도 귀국하지 못했던 것은 이승만 때문이다. 명분은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이었지만, 이면에는 이 씨 양녕대군파인 자신이 왕이라는 생각을 했다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화폐인물이 모두 이 씨라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아무튼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고 박정희 정권이 정통성 확보 차원에서 영친왕을 귀국시킨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를 신기한 사람으로 바라보았을 뿐 관심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이것은 탄압이나 조작의 결과가 아니라 조선의 왕족들이 자초한 것이다.

의친왕 이강(李堈) 정도가 일제에 비협조의 저항 했을 뿐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제에 순응했다. 더구나 지배층을 형성하던 양반층에서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다수가 일제에 협조했다. 신기한 것은 800명의 군대 대부분은 의병이 되거나 낙향하여 교육사업 등을 벌여 저항했으나 4천200여명의 중앙관료들과 경찰들은 거의 대부분 일제에 부역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을사늑약으로 한일 합방을 한 다음날 1천700만원의 은사금을 각 지방의 양반들에게 나눠 주었다. 이때 쌀 한섬이 3원이었으니 지금 시세로도 1조에 육박하고, 당시 조선에서 생산되는 쌀을 다 사고도 남을 정도의 규모였다. 조선의 지배층이 돈을 받고 나라를 판 것이다.

또한 1910년 10월 76명의 양반이 후작, 자작, 남작으로 구성된 ‘합방공로작’(合邦功勞爵)을 받았다. 한마디로 매국노들에게 일본귀족작위를 수여한 것이다. 이중 민영환이 자살로서 항의하는 등 13명이 거절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감읍해 했다. 당시 친일파 귀족들이 수령한 은사금은 모두 605만엔으로,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3천600억원이 넘는다고 한다.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이완용은 당시 15만엔을 은사금으로 받았는데, 금값을 기준으로 현재의 30억원에 해당한다. 특히 총리 대신에 오른 직후인 1907∼1910년 전국에 걸쳐 15건의 재산증식이 이뤄졌다.

이러니 우리나라에만 왕당파가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혁명 등의 역사적 단절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자신의 역할을 포기한 나머지 대중들에게 잊혀졌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조상이 명문집안이었다고 자신을 자랑하는 사람들 있다. 그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이 자랑하는 조상님들은 얼마에 나라를 팔았소?”   

 

 

* 이 글은 2008년 8월 25일 시민사회신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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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나라살림흥망사2

 

문자의 발명

문자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이에 대해 많은 학설이 있다. 서로의 약속에 의해 생겼다는 유물론적인 견해에서 누군가의 가르침에 의해서라는 관념론적인 견해까지 아주 다양하다. 영원히 알 수 없는 문제이겠지만, 다양하게 해석해 보면서 진실에 접근해갈 수 있다.

 

이중에 구조적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 기원전 4천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는 문명이 급속하게 발달하면서 고민이 생겼다. 공동체가 관개수로를 건설하면서 생산력이 증대하자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사람이 늘어나자 마을의 살림을 맡은 족장들은 고민이 생겼다. 부족원이 많아지면서 누가 세금을 냈는지를 일일이 기억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민 끝에 점토판에 기록하기로 했다. 예를 들면 벼이삭 모양은 밀이라는 뜻이고, 소머리모양은 소를 표시하는 방식이다. 이렇게 약속한 것을 점토판에 그리고 누가 얼마를 냈는지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이 약속기호를 문자라고 부르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는 설형문자이다. 바로 문자는 세금을 걷고, 관리하며, 사용하기 위해 지배층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셈이다.

 

 

문명과 함께 시작된 조직, 지도자는 지배자로

문명은 두가지 선택의 길밖에 없었다. 하나는 전쟁을 통해 식량을 뺏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업의 집약성과 생산성을 높이는 방법이 있었다. 전쟁은 제로섬 정도가 아니라 마이너스섬 게임이지만 농업발전은 플러스섬 게임이다. 당연히 협동을 위해 공동체가 생긴다. 협동을 통해 ‘관개와 배수공사’를 해야만 경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식량은 창고에 보관했다. 이를 저장하고 분배하면서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러면서 창고는 최초의 신전이 되었고 창고관리자는 최초의 사제였다. 그리고 문자를 기록하게 되면서 지식이 쌓이고 우주의 움직임까지 설명하는 마술적인 위치에까지 오르게 된다.

 

하지만 모든 강에서 문명이 발달한 것은 아니다. 기름진 양쯔강유역보다 척박한 황허강 유역이 문명을 건설한 것을 보면, 인간의 대응에 따라 달라질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이런 의미에서 이집트는 축복받은 곳이었다. 축복은 나일강이 선물한 것이다. 길이가 6650km나 되는 세계최대의 나일 강은 아프리카 대륙의 10분의 1이나 되는 유역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강수량이 엄청나다. 따라서 막대한 양의 토사를 하류에 실어 날랐고 이 토사가 하류의 삼각주를 기름지게 만들어 비료 한번 쓰지 않고도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로마시대에는 이집트의 밀이 제국을 지탱해 주었고, 18세기에도 여전히 프랑스보다 두 배나 많은 밀을 생산할 수 있었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는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일 강의 범람은 풍요를 약속하는 나일여신의 축복이다’라는 말도 있다.

 

당시 피라미드는 홍수로 일할 수 없는 7월에 건설되었다. 나일 강은 열대지방에서 시작되는데 5월에 열대성호우가 내리면 하류까지 오는 데 2달이 걸렸다. 그래서 이집트에는 7월에야 홍수가 발생하는데 말이 홍수지 날씨도 화창하고 물살도 매우 약해서 주변을 거의 파괴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홍수와는 개념이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홍수는 홍수여서, 농한기가 한여름에 있었던 것이다.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10년씩이나 걸렸던 이유는 이렇게 짬짬이 일을 했기 때문이었다. 또 이집트에서 측량술이 발달한 이유는 홍수로 쓸려가서 경계선이 없어진 농토의 소유지를 구분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홍수가 심하면 세금을 늘려 잡았다는 점이다. 홍수가 심할수록 더 많은 토사가 내려와서 땅이 기름지게 되고 그 해에는 풍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홍수가 발생하지 않으면 흉년이 되어 기근이 발생하는 국가위기상황이 되었다. 왕조가 교체되는 일도 있었다. 홍수와 가뭄의 경계는 불과 몇 미터의 수위 차이였다.

 

 

 

축복을 신전건설로 낭비한 이집트

나라가 잘사는 것과 국민이 잘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지금도 성장과 국민들의 경제생활이 상관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삶이 더 고달파 질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피라미드는 노예들이 건설하지 않았다. 대부분 농부들이었다. 농부들은 연중대부분을 들판에서 보내고, 파라오에게 군역을 졌으며, 2년에 한번씩 징수관이 와서 새로 세금을 매겼다.

 

이집트에게는 나일강이라는 축복이 있었다. 홍수도 축복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조건일뿐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재앙이 될수도 있었다. 우선 지배계층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많은 자원을 소비한다. 위협이 없으면 다른 일을 벌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념물의 건립이다.

 

지배계층은 자신이나 자신의 기념물에 갈수록 많은 자원을 소비한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신관들의 세력을 누른 파라오들이 자신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리고 그자신이 신이 되는 것이다. 그 이면에는 여름철 농한기에 농민들에게 소득을 분배하는 공공근로같은 경기부양효과를 노렸다는 분석도 있다. 이집트의 노동자는 매달 1.5자루의 보리와 네자루의 에머밀을 받았고, 서기와 조장은 두자루의 보리와 5.5자루의 에머밀을 받았다.

 

결국은 자신들이 권력유지와, 자의식을 채우기 위한 전시행정에 자원을 소비하고 사람들을 고달프게 한 것이다. 그래서 이집트 문명은 일찍부터 정체되기 시작한다.

 

문제는 이러한 역사는 문자를 아는 즉 왕과 귀족관료들만이 알았다는 것이다. 일반사람들은 짧고 고달픈 생활속에서 이런문제를 알수 없었다. 그래서 애덤스미드는 이 당시의 노예들을 ‘눈먼 자들’이라고 불렸다고 했다.

투명성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공통으로 이어지는 문제이다. 마치 당시에 신관들이 자기들만이 문자를 알고 기록하고 보여주지 않았듯이, 지금 권력자들도 자기들만의 언어(혹은 방식)으로 기록하고 시민들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지금의 4대강이나, 대규모 국책사업, 더 나아가 대자본의 거대빌딩들도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물론 용서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눈먼 자들’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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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송주영. 이집트역사 100장면. 가람기획 2001

레리 고닉. 이희재 옮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세계사 1. 궁리 2006

조루즈 장. 문자의 역사. 시공사 2002

정규영. 나일강의 선물 이집트. 여름언덕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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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스포츠 정신을 이야기할 때 근거로 드는 것이 고대에 1200년간이나 열렸던(기원전 776∼기원후 393, 293회 개최) 올림픽이다. 그래서 현대 올림픽의 타락과 승부에 집착하는 스포츠 현실을 개탄하는 사람들은 항상 고대 올림픽의 순수성을 되찾자고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대 올림픽은 순수한 아마추어의 무대가 아니었다. 고대 올림픽에서는 시작하는 첫날 모든 선수들과 심판들이 올림피아의 평의회장 앞에 있는 ‘서약의 제우스’상 앞에서 부정을 저지르지 않겠다고 선서했다. 제우스상은 양손에 번개를 들고 있는데 부정을 저지르면 벼락을 맞을 줄 알라는 경고가 아닐까 싶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각종 부정을 저질렀다는 것을 반증한다. 실제로 올림피아에는 많은 제우스 동상 받침대가 남아 있는데, 이것은 부정을 저지른 자가 낸 벌금으로 제작된 것이었고 동상마다 그 이유가 적혀 있었다.


대표적인 부정은 뇌물을 먹이거나 국적을 속이는 것이다. 112회 올림픽(기원전 332년) 때 아테네의 5종경기 선수가 상대에게 뇌물을 주었다가 발각돼 벌금을 냈다. 재미있는 것은 아테네인들이 이 벌금을 취소하라며 올림픽보이콧을 선언한 일이다. 하지만 다른 지역의 폴리스들에게 비난과 공격을 받고 결국 굴복한다. 또 돈에 매수되어 국적을 바꾸었다가 본국에서 추방당하는 선수도 있었다.


아마추어 정신을 철저히 지킨 것도 아니었다. 출전 선수들은 월계관을 쓰는 영예를 위해서 열심히 노력했다. 월계관은 귀한 집안의 자제가 금으로 만든 낫으로 직접 자른 것이었다. 여기에서 그치면 아마추어 정신의 표본이라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돈이 걸려 있다는 사실이었다.


각 폴리스는 우승을 독려하기 위해 우승자에게 막대한 특전을 부여했다. 동상을 세워주기도 하고 아테네에서는 상금과 함께 평생 공짜 식사를 제공했다. 아테네의 솔론 시대에는 올림피아 제전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 500드라크라를, 지방경기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100드라크라의 포상금을 주었다. 1드라크라는 양 한 마리 혹은 곡식 1메딤도스(곡물의 단위)의 가치가 있었는데 500메딤도스의 땅을 가진 사람이 상류층이었다고 하니 경기에서 한번만 우승해도 당당히 상류층으로 편입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포상금은 훗날 나라간의 경쟁이 격화되자 3000드라크라까지 치솟았다.

 

 

 


선수들은 현재의 프로선수들처럼 다른 경기에도 출전해 막대한 돈을 벌었다. 당시에는 올림픽말고도 경기대회가 많았다. 한 도시에 하나 이상의 경기대회가 있었으며 아테네나 스파르타 같은 곳에서는 수십 개의 경기대회를 개최했다. 도시마다 우수한 선수를 유치하기 위해 상금을 내걸었고 당연히 이를 노리는 전문 직업 운동선수들이 등장했다.

한마디로 프로선수가 등장한 것인데 그 수가 상당했다. 특별히 프로와 아마추어의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선수들 대부분이 프로화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처음에는 상류 계급에 한정되던 출전 자격이 외국인은 물론 하층 계급에게로 확대되었다. 엄청난 돈과 신분상승, 그리고 국가의 위신, 엄밀한 의미에서 고대 올림픽 선수들은 아마추어 정신과는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우리는 올림픽 기간만큼은 ‘올림픽휴전’이라고 해서 전쟁도 중지했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쟁이 많았다. 폐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그 예다. 스파르타는 90회 올림픽 때 전쟁을 벌여 벌금을 부과 내야 했는데 이것을 거부했다가 제명당하기도 했다. 더 심한 경우는 엘리스와 피사의 전쟁이다. 올림픽은 본래 피사에서 열렸다가 올림피아가 있던 엘리스에서 개최되었다. 피사는 주최권을 되찾기 위해 전쟁을 벌였다가 패해 폐허가 되고 말았다. 올림픽 주최권 문제가 전쟁도 부른 것이다.


관계자만 4만 명이 모이는 큰 행사였기 때문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모여든 사람들도 많았다. 정치가들은 자기 세력을 과시했고 선수를 매수하기도 했다. 웅변가나 시인, 평론가, 예술가들이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돈을 벌기 위해 모여 들었다.


결국 돈, 명예, 정치를 떠난 ‘순수’한 올림픽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소망이었을 뿐이다. 다만 기억해야 할 것은 올림픽의 초기 정신이다. 올림픽의 초기 정신은 전쟁을 중단하고 세상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 제전을 개최하여 우정을 두텁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올림픽의 개최지는 신성지역으로 구분되어 성을 쌓지도 못하고 무기를 가지고 들어올 수도 없는 중립지역으로 선포되었다.


올림픽의 기원과 정신은 반전과 평화에서 시작했다. 당시 펠로폰네소스의 도시국가들은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져 있었다. 더구나 페스트까지 창궐해 참담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때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위해 올림픽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올림픽은 통합의 상징이다. 1200년 동안 어떤 강대국이든 반전평화의 원칙을 지켜야 했다.


올림픽은 다원주의를 원칙으로 했다. 그래서 특정 종교를 강조하는 것도 금지했다. 올림픽이 중단된 것은 그리스가 로마에 합병되고 나서도 400년이 지난 395년이었다.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정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올림픽 제전을 이교도들의 종교행사로 규정해 폐지한 것이다.


1500년 후 쿠베르탱은 전쟁 등으로 피폐해진 유럽의 평화를 위해 올림픽을 다시 창시했다. 쿠베르탱은 고대 올림픽대회가 외부세력들이 올림픽 정신을 좀먹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IOC(국제올림픽위원회)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그 IOC마저도 심각하게 오염되었다.

IOC와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이유가 혹시 단순히 돈 때문은 아닐까. 우리가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고 하는 운동 상황을 보면 유치를 실패한 게 돈 벌 기회를 잃은 것 같아 더 소란스러운 것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것은 그래도 원래 초기의 취지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일 게다. 아직도 스포츠 정신을 위해 올림픽을 참여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과거를 막연히 그리워할 게 아니라 진짜 무엇을 하려 했는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원래의 정신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어땠는지를 제대로 보면서 교훈을 찾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Posted by flashfre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