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엑스파일>은 외계인이 등장하는 음모론을 다룬 것 이라고 할수 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음모론을 끊임없이 신봉하고 열광해왔다. 그것은 음모론이 신비주의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뭔가 불가사의한 현상뒤에 어떤 권력이나, 세력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는 식의 해석이 유행하면서 세상의 모든일이 음모론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논리"로 설명 불가능한 모든 것이 "음모"로 설명된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과학(논리)" 이전 시대에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던 "신비"의 대체 개념인지도 모른다. 즉 근대 이전의 "신비"가 오늘날에 와서는 "음모"로 대체된 것이다. 그리고 진위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이 자체는 무척이나 "유용한" 개념이다.  

 

가장 대중적인 혁명중의 하나인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서도 음모론이 제기되었다. 쟈코뱅당은 프랑스 혁명당시 온건파 지롱드당에 반하여 과격파로 분류되던 정파이다. 프랑스 혁명당시 예수회 수사였던 아베 바루엘은  “자코뱅주의의 역사에 대한 회고록”이라는 책에서 혁명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쟈코뱅당 핵심인사들의 음모에 의해서 였다고 주장한다. 자코뱅은 프랑스혁명 때 제3 신분 대표들이 자주 모였던 수도원의 이름이다.

역사가인 토크빌은 프랑스혁명의 원인을 오히려 경제발전과 정치적 자유의 확장에서 찾았다. 이전보다 악은 적어졌지만 악에 대한 국민의 감수성은 더 예리해져 혁명이 일어났다는 얘기다. 음모론에 근거한 기득권층의 행태는 이런 감수성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은 음모론은 사회의 상황이나 역사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몇몇 때문에 모든상황이 일어나므로 그들만 제거하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분히 개인주의적 사고의 확장이다. 그래서 역시나 음모를 자주 사용하는 파시즘에서 이 부분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드라마 X파일 주인공 멀더의 사무실 벽에 붙어있는 포스터. UFO 사진과 함께 "나는 믿고 싶다"는 문구가 눈길을 끈다.

 

2차대전 전후 일어난 반유대주의 열풍은 ‘유대주의 음모론’이 촉발했다. 또한 동경대지진 같은 경우에도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풀었다’는 음모론으로 재일 조선인들이 처참한 수난을 당하기도 했다.

‘아니면 말고 ’식의 재미삼아 하더라도 문제가 되는데 ‘반드시 그렇다’라는 것은 현실정치와 대중적 망상과 결합하는 경우에  집단적인 광기를 불러올 수 있다.

 이른바 음모론의 "주역"으로 사람들이 지목하는 존재가 대개는 외계인, 외국인, 비밀결사 등 전형적인 "타인"이라는 점에서도 이런 파시즘적 논리가 드러난다. 즉 "우리"와 다른 "타인"이 "우리"를 해코지하려 한다는 피해망상의 논리인 것이다. 그렇다면 음모론 자체도 "음모"일까?

지난 20여년의 민주화 결과 문제점에 대해 무척이나 감수성이 예민해진 우리국민들에게 음모론으로 터무니없는 억지주장을 펴는 것은 더욱더 우리 민족이 특별히 가지고 있다는 홧병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체스터튼이라는 작가의 <오소독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광인의 설명은 실제로 온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의 설명만큼 완벽하다. 그러나 그의 설명은 대다수의 사람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것이다. (...) 광인의 이론은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그 많은 것을 많은 방법으로 설명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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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3년 5월 29일 화요일, 정복자 메메드2세가 이끄는 투르크군대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였다. 오스만 술탄의 포병대는 과거 천년이 넘도록 강력한 군대들이 점령하지 못한 곳,  동로마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는 동로마제국을 구하려는 최후의 일전을 벌였으나 도시는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영원한 줄 알았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져버린 것이었다. 이로서 1123년의 서사시가 막을 내렸다.

역사상 가장 오래 지속된 나라에 대해서는 이론이 많을 수 있다. 하지만 역사가 기록되고 나서의 기록으로는 동로마제국이 가장 오래 지속된 국가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의 로마에 수도를 두었던 서로마제국의 몰락이 로마의 몰락이며 그 이후를 중세라고 생각하고 있다.

동로마제국의 판도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서유럽을 중심에 두고 보는 역사인식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도 않았지만 하루아침에 무너지지도 않았다. 330년부터 자그마치 1453년까지 천년을 넘게 존속했다.

그 나라가 바로 동로마제국이다. 로마공화정의 시작인 BC 509년부터 따진다면 2천 년을 유지한 것이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란’이 1453년이었으니, 근대의 여명까지도 존속했던 셈이다.

만약 우리가 러시아나 동구의 영향을 받았다면 아마도 크리스마스도 12월 25일이 아니라 동로마제국 정교회의 영향을 받아 1월 7일에 기념했을 수도 있다.


‘빵과 서커스’로 지탱된 서로마

동서를 연결하며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던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서구 국가들은 동방과의 교역을 위해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1488년 포르투갈 항해가 B.디아스가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에 도달하고 1492년 C.콜럼버스가 아메리카에 도달한다. 그리고 세계를 제패하면서 역사의 중심을 그들에게 맞추어 버렸다. 동로마의 역사도 묻혀버렸다.

그러나 서유럽국가들은 동로마제국에 큰 빚을 지게 된다. 동로마의 유산과 유민들은 서유럽으로 이동하여 르네상스를 가져온다. 비로소 유럽이 어둠에서 깨어나게 된다. 종교개혁의 요구가 들풀처럼 전 유럽을 불태우면서 이성과 합리주의에 기반을 둔 국민국가를 건설하게 된다. 동로마는 서유럽이 근대로 넘어가는 가교역할을 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서로마제국은 용병대장 ‘오토아케르’에 멸망당한다. 초기부터 시민군 중심으로 운영되던 서로마는 전쟁과정에서 획득된 노예 중심의 ‘라티푼디움’이라는 농장형태가 등장하면서 중소 농민이 몰락하게 된다. 그 잉여생산물은 몰락한 일반시민들에게 ‘빵과 서커스’로 제공된다. 번영의 결과를 가지고 체제의 안정을 도모한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도 노예공급이 감소하면서 끝이 난다. 노예공급이 줄어들면서 대토지 소유자를 중심으로 ‘콜로나투스’라는 대농장이 형성되고 예속농민이 편입되고 서서히 농노화되어 중세시대 ‘장원’의 시초가 된다.


     동로마제국의 해전


현재와 비교해본다면 미국이 비슷하지 않을까? 과거 ‘빵과 서커스’에 의해 지탱되던 로마시민들의 운명처럼, 기축통화와 군사력 유지가 어려워지면 소비사회의 ‘복지와 스포츠’도 한계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중소농민이 주축이 된 동로마의 군대

이 나라는 어떻게 천년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을까?  테오도시우스성벽이 굳건해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몇 가지 행운 때문이라는 등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여러 가지 답이 있겠지만 모든 것은 사람, 그 중에서도 강력한 군대가 있어야 가능했을 것이다.

 그 병사들은 자신의 가족과 땅을 지키려는 ‘테메’의 병사들이었다. 테메는 소아시아의 징집병들이었고 그들은 ‘둔전병제’로 자신의 땅을 가진 중소농민들이었다. 중앙에는 ‘타그마타’라고 하는 용병들도 있기는 하였지만 ‘테메’가 국가방어에 주축이었다. 동로마 개혁의 역사는 이 테메를 이루는 중소농민을 지키고 확대하는 과정의 역사였다. 
 

성을지키는 동로마 병사들

 
초기에 동로마는 용병 위주였으나 7세기부터 이슬람 군대에게 계속 패배하면서 정책을 수정하게 된다. 그래서 세금의 부담을 줄이는 대신 군사적인 의무를 다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인 ‘테메’가 등장한다.

‘스트라티오테’라고도 불리는 이 농민군은 자신의 가족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것이므로 효율적이고 저렴한 비용으로 유지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무장하고 생계문제도 스스로 해결했다. 해군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걷느냐’와 ‘어떻게 걷느냐’

동서양 공히 국가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조세와 군역은 국력의 척도이다. 따라서 세금을 걷고 군사력을 유지하는 시스템을 어떻게 유지하는가에 따라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해주는 것이다.  그 핵심은 나라마다 다르게 표현하지만 자신의 땅을 소유하고 세금을 내며 군역에 종사하는 둔전병제에 있었다.

이들은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이나 직업군인들과 달라서 잃어버릴 것이 있는 계층이었다. 둔전병제의 시행은 공평하게 세금내고 군역을 수행하는 시민들이 국가의 중추로 자리잡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며 국가적 결속력을 유지하는 기본적인 조건을 제공해준다. 세금이란 ‘얼마나 걷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걷는가’도 중요하다. 대부분의 국가는 건국초기에는 권력의 정당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조세의 형평이 어느 정도 이루어지게끔 노력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얼마나 걷는가’만 중요하게 된다. 필연적으로 부의 집중과 불평등을 낳게 되고 사회적 일체감은 무너진다. 종국에는 그 ‘얼마’도 걷지 못하게 되는 ‘시스템 붕괴현상’에 직면하여 멸망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혁명으로 땅과 집이 생긴 지원병들로 이루어져, 용병으로 이루어진 다른 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유럽을 제패한 것도 좋은 예이다. 또한 중국 삼국시대 조조가 많은 전쟁에서 지면서도 마침내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은 둔전병제로 인한 군대의 확보와 재정의 안정 때문이다.


양극화가 초래할 잘못된 미래

우리나라의 양반은 군역과 요역 등에서 면제받고 전세도 내지 않았다. 자칭 ‘사대부’라 칭하면서 고통은 민중에게 전가시키고 자신들은 권력을 행사했다. 영조시대에 양반의 비율은 50%를 넘었다. 1995년 갑오경장 당시에는 양반의 비율이 80%를 넘었기 때문에, 해방시킨 공노비의 수가 5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니 극소수의 사람이 세금을 내고 군역을 수행한 것이다. 그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과거의 둔전병은 ‘현대판 중산층’이 아닐까 한다. 부의 분산과 그로인한 공평한 과세 이것이 동로마제국의 병사들이 목숨 걸고 국가공동체를 지켜야하는 이유였고 그들이 천년을 지속하게 된 이유이다. 군역도 세금의 일종이다.

소수에 의한 부의 집중, 그리고 서민들의 중과세, 부유계층의 조세회피는 국가공동체를 심각하게 균열시키는 요소이다. 지금 급속히 진행되는 양극화는 이런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보이고 있다. 과거는 현재의 거울이다. 잘못된 과거는 잘못된 미래를 가져올 수도 있음을 직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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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하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은 가장 거대한 수에즈 운하와 파나마 운하이다. 운하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원래운하는 교통을 위한 수운용과 홍수조절을 위한 관개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처음에 인류는 물길을 파서 홍수조절을 위한 관개를 했다. 그러다가 물길을 보다 넓고 깊게 만들어서 배를 띄우면서 운하가 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중국의 베이징과 항조우를 잇는 대운하는 서기 5세기에 시작해서 20세기 초에 완공됐다. 그중에서 운하를 건설하다가 백성들의 반발에 부딪혀 몰락한 수양제도 있다.

유럽에서는 12세기에 이태리 반도의 베네치아는 바다에 면한 늪지대에 운하를 파서 대단한 도시국가를 건설했다. 또한 1770년대 들어 영국은 하천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도 지중해와 대서양을 연결하는 운하를 건설했다. 산업혁명으로 마차를 이용하는 육상운송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이다. 미국도 건국초 부터 대규모의 운하를 건설하였다.

하지만 1830년 들어 운하건설 붐은 수그러들었다. 그것은 새로운 대규모 교통수단인 철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운하로 운송되는 물량은 대폭 감소했고, 1920년대 들어선 작은 운하들이 방치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 운하는 손꼽을 정도이고 관광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결론적으로 운송수단으로서 운하는 철도의 등장과 더불어 역사의 유물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현재 사용 중인 운하도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철도가 등장하기 전에 건설한 것들이다. 더구나 재미있는 것은 도로와 자동차의 발달로 철도마저 경쟁력을 상실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운행 중인 철도는 대부분 고속도로와 자동차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에 건설된 것들이다.

우리나라에도 운하에 대한 시도는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중단되었다. 예를 들면 태종때 신하들이 한강부터 남대문까지 운하를 파자고 주장하자 “우리 땅이 운하를 파기에 맞지 않아서 중국처럼 운하를 팔수 없다”라고 거부했다. 하지만 관료들이 기술적으로 가능하고 1만명이면 충분하니 일단 한번 시험해보자고 하자 재차 주장하자 백성들의 고통이 원래 거부하는 이유라면서 끝내 듣지 않았다고 한다. 꼭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진행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나라의 왕조들이 오래 지탱한 비결이기도 했던 것이다.

파나마 운하를 확장하는 사업에 대한 파나마의 국민투표가 압도적 표차로 통과되었다고 한다. 파나마 운하에 대한 경제의존도가 높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57%의 국민들이 기권했고 공사과정에서의 부패가 예상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예상밖으로 파나마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은 하루 기준 38~40대에 불과하고 2005년도 파나마정부에 4억8900만달러 수익을 준 것이 전부라고 한다. 가난한 파나마에서야 이정도 돈이라면 환경이던 어떤 문제건 상관없이 추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비교할 조건도 아닌 우리나라에 운하를 놓자고 주장하는 시대착오적인 건설족들을 보노라면 그나마 인프라 건설이라는 부분만큼은 진정성을 가졌던 수양제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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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서울 시내 도로가 한산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휴가를 떠났기 때문이다. 한산한 도로를 보면 우리 교통이 얼마나 혼잡한가를 새삼 알게 된다. 사실 우리의 교통 혼잡은 전세계에서 비교 대상을 찾기 힘들다. 교통시설에 대한 막대한 투자에도 불구하고 승용차 의존도는 심해져 도시 교통 혼잡은 가중되고, 도시의 경쟁력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 서울 등 대도시의 최근 10년간 인구는 연평균 0.06% 늘어났지만 승용차는 연평균 4.17% 증가했다. 도시지역 혼잡비용이 매년 4.7% 늘어나 2008년에는 17조원에 이르렀다.

교통 혼잡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교통유발부담금이다. 원인자 부담 및 수익자 부담 원칙에 의해 주택을 제외한 일정규모 시설물에 대해 부과하는 것으로 1990년부터 1000㎡ 이상의 건물에 대해, ㎡당 350원을 부과하고 있다. 더 이상 공급관리로는 문제를 풀 수 없기에 수요관리로 방향을 전환하기 위한 것이다. 이미 다른 나라들이 시행하는 것을 참고한 것이다.

문제는 이 부담금의 기준이 지난 20년간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대부분의 지자체는 감경조처까지 취하여 2011년에는 징수액이 1751억원에 불과하다. 이 중 액수가 가장 많은 서울의 경우에도 혼잡비용이 7조원인데, 부담금 징수는 610억원에 불과하다.

최근 환경운동연합이 서울시민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는 63.9%의 시민들이 교통유발부담금 인상에 찬성했으며, 29.3%는 1000원으로의 인상에 찬성하기도 했다. 이는 서울시민의 차량 보유가 400만대에 달하는 것을 고려한다면 압도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달 중순 기획재정부 산하 부담금 심의위원회에서는 교통유발부담금 인상 심의를 논의할 예정이다. 그런데 최근 정부 일각에서는 경제에 부담을 주는 부담금을 축소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마치 감세나 규제완화를 할 때의 논리와 비슷하다.

정부는 법과 재정으로 공공성을 지켜낸다. 이 두 가지를 활용해서 지원과 규제를 한다. 부담금도 그 방법 중 하나다. 모든 법과 세금은 부담만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늘려야 할 것도 많다. 이런 의미에서 교통유발부담금은 수요관리 차원에서 필요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더구나 교통부문은 에너지의 19.7%를 소비한다. 따라서 경쟁력과 환경문제 모두에 반드시 필요한 제도다. 교통유발을 한 원인자 부담은 당연하고, 교통수요를 줄이는 방향이어야 한다.

물론 형편에 따른 차등징수와 시설 소유자들의 자발적 수요관리를 유도하기 위한 지원정책이 필수적이다. 100%까지 감면할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실효성이 높아지면 혼잡은 줄고, 대중교통이 활성화되며, 적자는 개선된다. 또한 대형 유통센터 등은 비용이 증가하여 전통시장이나 자영업자 등의 상대적인 경쟁력이 증가할 것이다. 환경개선은 당연히 따라온다.

정부의 한편에서는 교통유발부담금의 실효성이 낮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선택은 단순하다. 실효성을 높이든지, 필요 없다면 폐지하는 것이다. 교통 혼잡의 원인과 해법을 명확히 해야 한다. 도로가 부족해서라면 도로 공급 중심의 성장정책으로 가야 한다. 차량이 많아서라면 부담금으로 수요를 관리해야 한다. 무엇이 지속가능할까. 솔직해져야 한다. 말로는 수요관리를 하겠다면서, 건물에는 부담금을 감면해주고, 전통시장과 대중교통 등에는 예산을 지원하는 모순되는 정책을 펴고 있다. 결국 밑 빠진 독처럼 예산만 낭비하는 지속 불가능한 정책이다.

정창수 나라살림연구소 소장

Posted by flashfresh

감자

칠레, 페루 등 남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현재 볼리비아 코파카바나의 티티카카 호수(남아메리카 최대의 담수호로 페루와 볼리비아의 국경지대) 근처에서 기원전 5C경 잉카인이 주식으로 재배를 시작했다.  

유럽에서 감자는 ‘악마의 작물’이라 불렸다. 16C 스페인 함대를 통해 유럽에 전파된 감자는 식물학자의 연구용으로 재배됐다. 식물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먹지 않았다. 현재의 감자보다 더 작고 검어 보기 흉했던 점, 성경에도 실려 있지 않았던 점, 씨감자로 번식하는 점 때문에 ‘악마의 작물’이라고 해서 먹지 않았다.  

곤궁했던 유럽의 군주들은 감자 재배를 독려했다. 한랭기후에 강하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단위 면적당 수확량도 많아 구황작물로 감자 보급에 힘을 쏟았다.

프랑스는 왕비가 감자 꽃 장식을 하고 파티에 참석하고, 낮에 감자밭에 경비를 세우게 하고 밤에는 철수시켜 호기심을 갖게 만들기도 했다.  

아일랜드의 경우 정복자였던 잉글랜드 귀족이 감자 재배를 독려했다. 농민이 감자만 먹으면 귀족에게 돌아올 것이 더 늘어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1840년 감저전염병이 나돌았다. 오직감자 농사만 짓던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들었다. 많은 난민이 먹고 살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 때 이주민 중 미국 35대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의 증조부가 포함돼 있었다. 잉글랜드의 감자정책이 낳은 정치적 부산물이었다.  

비타민이 풍부에 프랑스에서는 '밭에 나는 사과'라는 애칭을 얻었다. 감자는 영어로 포테이토(potato)다. 그런데 원래 포테이토는 고구마를 의미했는데 감자에게 자리를 내주고 sweet potato로 불린다.  

국내에 감자가 전래된 것은 1820년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1824~1825년 사이 관북에서 처음 들어왔다고 돼 있다.  

1832년 영국 상선이 전라북도 해안에 약 1개월간 머물렀는데 배에 타고 있던 선교사가 씨감자를 나눠주면서 재배법을 가르쳐 줬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기록에는 아일랜드와 비슷한 풍경이 기록돼 있다. 일부에서는 감자가 좋은 식량 대용품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씨감자를 걷으려 했지만 백성들은 내놓지 않았다. 관아에서 감자 재배를 독려하면 노역과 함께 많은 세금을 걷어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감자는 수십 년 사이에 보급됐고 양주, 철원, 원주 등지에서 흉년에 굶주림을 면하게 해주었다.

 

Posted by 박신용철


인간은 언제나 죽음과 병의 위협에 직면해 왔다. 그래서 질병에 대한 치료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의료행위가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은 이집트이다.

BC 2700년경의 비석에 의사와 치과의사를 구분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의학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보면 의학서에 쓰여진 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중범죄로 처벌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의료행위에 대한 인간의 역사

이집트의 의학은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서양의학의 모태가 된다. 역사상 최초의 의사로 기록되어있는 사람은 임호텝(Imhotep)이다. BC 2600년경 이집트의 대신이었고, 피라미드를 설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부자들의 호출에만 응했다. 이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한계가 많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의학이 그리스에 전달되면서 물론 자유민들에 국한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의료행위를 하는 문제가 고민되었고 직업으로서의 의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술을 전수해준 이집트에 대한 선망은 매우 높아서 소크라테스마저도 선진국 이집트를 찬양할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BC 2600년경 황제(黃帝)가 의학교과서인 <내경>(內徑)을 만들어 의학을 확립했다. 그런데 양 문명의 의학은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은 외과적이고 해부학적인 것이 좀 더 중심이라면 동양은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 때문에 약재 중심으로 발전해온 점이 다른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학의 발전은 동서양 공히 상류층에 국한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들은 방치되거나 주술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히 공공의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과학의 발전과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대중의료의 필요성이 증대하면서 극복되기 시작한다. 18세기만 하여도 유럽의 병원에는 의사가 없었다. 당시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환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일종이 격리였다.

한때 빛 발한 북한의 공공의료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중국은 공공의료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할수 있다.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비슷한 수준의 공공의료정책을 시행했다. 삼국시대에 약부(藥部)나 약전 등의 기관을 설치하여 의료정책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사를 일본에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각 군현에 약점(藥店)을 두고 의사를 배치했다. 이때 이미 과거로 의사를 선발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독창적 의서인 동의보감의 발간 이후로는 시골 마을마다 균일화된 의료가 보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북한은 공공의료에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그래서 1982년에는 무상의료에 415명당 의사 한 명씩을 배치하고 의사담당제를 두어 책임지게 하였다. 당시 세계의 일부 지식인들이 북한에 대해 극찬을 한 이유 중에 공공의료의 완비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체제가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의 상황이다. 현재 북한의 의료상황은 절망적이다. 공공의료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의료물품 마저 없어 응급처치조차 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나 남북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매우 부족한 현 정권에서는 해답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Posted by 밑빠진독

'개성공단'과 구한말 개성상인의 '좌절' 정창수
2008-11-29 09:45:09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정의는 ‘집에만 있고 바깥출입을 아니함’, ‘집에 은거하면서 관직에 나아가지 아니하거나 사회의 일을 하지 아니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고려가 망하자 고려의 유신 72명이 지금의 개성직할시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산나물을 뜯어 연명하며 고려에의 충성을 다짐한 사람들에서 기원하여 ‘꼼짝하지 않고 들어앉아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두문불출이 되었다고 한다.

'복식부기' 발명한 개성상인

개성은 벽란도와 함께 5백년 왕도였다. 그래서 고려왕조를 전복하고 등장한 조선왕조도 처음에는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옮긴 후에도 개성부라고 하여 수도에 버금가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였다.

조선왕조의 성립 후에는 정권의 기피로 인해 관직에서 소외된 개성인들이 이미 왕조의 전기부터 식자층까지도 상업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널리 알려진 송도사개문서(松都四介文書) 즉 지금의 복식부기인 개성부기를 발명해낸 것도 이러한 배경이 있었다. 

조선왕조에 비해 국내상업과 외국무역이 발달했던 고려왕조시대의 수도였던 개성은 상업의 중심지 였다. 이런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후기에 이르자 전국에 걸친 조직망을 가지고 상업활동을 벌이는 한편 의주의 만상과 동래의 래상을 통해 외국무역부분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왔다. 

'캘리포니아 인삼'도 등장

우세한 자금력으로 전국 거의 모든 상업중심지에 송방(松房)이라고 부른 일종의 지점을 차려놓고 무역을 하고 중국과 일본과는 당시 가장 중요한 인삼거래를 했다. 일찍부터 자연삼을 수출하던 개성상인들은 18세기 부터는 아예 인삼재배법을 개발하여 개성에다 삼포소(蔘包所)를 두고 인삼을 홍삼으로 가공하여 팔포로 조달했다. 당시 수출량은 1797년(정조21년)에 120근이었던 것이 1851년(철종2년)에는 4만근으로 증가했다. 

처음에는 강계에서 나던 자연삼이 주를 이루었던 것이 개성상인의 노력으로 재배삼으로 거듭난 개성인삼은 구한말 우리경제의 핵심중의 하나였고, 당시 기축통화인 은을 대체하는 등 자본이 중심이 되는 세계 무역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던 대표상품이었다. 모조품으로 캘리포니아 인삼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물론 그 가능성은 식민지로 전락하여 일본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말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이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개성은 여전히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주는 도시이다. 더구나 개성공단이라고 하는 곳은 단절의 시대를 지나 이제 남북문제의 상징이 되어버렸을 뿐만아니라, 실제 경제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역사는 기억할 것이다"

많은 남북한 사람들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희망을 이야기했던 개성공단이 문을 닫을 상황이 되었다.

구한말 당시의 개성상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개성공단과 관련된 수많은 남북의 한국인들이 안타까워하고 있다. 또다시 정치적 논리와 실책으로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단절하고 말 것인가.

차이가 있다면 구체적인 책임자를 찾을 수 없었던 구한말과는 달리 이번 상황은 필연적인 것도 아니어서 책임져야할 사람들이 분명하다는 점이다. 역사는 반드시 그들을 기억할 것이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Posted by 밑빠진독

과거의 ‘계모임’과 현실의 ‘귀족계’
   
장안의 화제 ‘귀족계’ 형성이 궁금하다
서민의 안전핀·경제활동, 변질의 역사

  
다복계라는 ‘귀족계’가 장안의 화제다. 마치 전통문화가 되살아오는 기분이다. 계(契)는 우리나라의
 독특한 사회제도요 조직 형태이다. 다른 문명권에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계처럼 고대부터 사회구조 속에 포괄적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은 없었다.

계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오랜 전통 속에 조금씩 형성되어왔기 때문인데, 가정
멀리는 삼한시대 공동유희인 제례(祭禮)와 회음(會飮) 등이 있었다. 통일신라시대에도 여러 가지
 형태의 계와 비슷한 모임들이 성립 발전하였는데, 그 예로서 여자들의 길쌈내기인 가배(嘉俳),
화랑들의 조직체인 향도(香徒) 등이 있었다.

삼한시대부터 이어진 전통

고려시대에는 문헌상으로 확인되는 최초의 계가 나타나는데, 12세기 중엽 유자량(庾資諒)이
동료들과 함께 조직한 문무계(文武契)를 조직하였다고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교계 즉 친목계는
 고려말기까지 상당히 성행하였는데 어디까지나 지배층 내지는 유지들 사이의 사교계로 한정되어
있었다.

계는 15세기 중엽에 이르면서 새로운 종류의 계로 분화되기 시작하는데, 족계(族契)와 동계(洞契)가
 그것이다. 모두 이전의 사교계의 바탕 위에서 분화된 것인데, 그 구성원이 일정 범위의 친족
집단성원이나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사람들로 한정하였다.

조선후기에 들어서서는 계의 종류가 훨씬 다양해지고, 계를 만드는 사람들의 범위도 크게 확장된다. 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학계나 길흉부조를 하는 상계, 소나무의 보호와 선영을 지키려는 송계 등
 다양한 계가 발전하였는데, 특히 상계는 경제적 부담을 해결해야한다는 공동체의 현실적이 필요성
 때문에 신분의 차별이 거의 없어지기도 했다. 18세기 말 이후에는 세금 때문에 생겨난
군포계(軍布契), 호포계(戶布契), 등으로 주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관에서 장려하는 일까지 있었다.

또 하나의 변화는 조선전기에는 갹출하는 방식이었으나 후기에는 토지 등의 기금의 형태로 증식하는 방식으로 발전되어갔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가 공유재산을 약탈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무튼 개항초기에는 크림계, 비누계가 처녀들 사이에서 유행했고, 청년들은 닭잡아먹기,
돼지잡아먹기의 계계, 돈계를, 아이들은 떡계, 엿계를 만들기도 했다. 해방 후에는 ‘낙찰계’가
유행해서 큰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 곗돈을 타서 고리이자로 돈을 불리고 추첨형식으로 곗돈을
타는 방식의 낙찰계는 실패하거나 돈을 떼이면 가정파탄이 오는 등 개인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후에도 60년대 말에는 가발계, 70년대에는 쌍꺼풀계가 유행하는 등 계는 그 시대상을
보여주는 거울이다.

가정파탄의 주범되기도

속담에 ‘계 빠지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뜻하지 않은 횡재를 뜻한다. 은행이나 보험회사가 없던
시기에 계는 우리사회의 안전판이요, 유용한 경제활동이었던 셈이다.

계는 우리민족의 유구한 문화이므로 ‘귀족계’ 그 자체를 탓할 것은 없다. 또 곗돈이 많다는
것만으로는 시비할 문제가 아니다. 다만 불투명한 재산형상과 세금추징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상식수준의 의혹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사건이 터지자 피해 규모가 큰 사람들이 오히려 사건 공개를 꺼렸다고 한다. ‘검은 돈’의 악취가 솔솔 풍기는 것이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Posted by 밑빠진독

의료는 공동체의 의무, MB정부는?
   
색깔있는역사스케치[52]

인간은 언제나 죽음과 병의 위협에 직면해 왔다. 그래서 질병에 대한 치료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여왔다. 이러한 의료행위가 서양에서 가장 오래된 곳은 이집트이다.

BC 2700년경의 비석에 의사와 치과의사를 구분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의 의학이 발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 보면 의학서에 쓰여진 대로 치료하지 않으면 중범죄로
처벌한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의료행위에 대한 인간의 역사

이집트의 의학은 그리스로 전해지면서 서양의학의 모태가 된다. 역사상 최초의 의사로
기록되어있는 사람은 임호텝(Imhotep)이다. BC 2600년경 이집트의 대신이었고,
피라미드를 설계하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 역시 부자들의 호출에만 응했다.
이들을 처벌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전히 한계가 많았다.

그러나 이집트의 의학이 그리스에 전달되면서 물론 자유민들에 국한되지만 좀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의료행위를 하는 문제가 고민되었고 직업으로서의 의사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기술을 전수해준 이집트에 대한 선망은 매우 높아서 소크라테스마저도 선진국 이집트를
 찬양할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BC 2600년경 황제(黃帝)가 의학교과서인 <내경>(內徑)을 만들어 의학을 확립했다.
그런데 양 문명의 의학은 다른 방향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은 외과적이고 해부학적인 것이
좀 더 중심이라면 동양은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 때문에 약재 중심으로 발전해온 점이
다른 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의학의 발전은 동서양 공히 상류층에 국한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일반인들은
방치되거나 주술적인 방법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공히 공공의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전염병이 창궐할 때에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은 과학의 발전과 국민국가의 형성으로 대중의료의 필요성이 증대하면서 극복되기
시작한다. 18세기만 하여도 유럽의 병원에는 의사가 없었다. 당시 병원은 환자를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 환자를 수용하는 곳이었다. 일종이 격리였다.

한때 빛 발한 북한의 공공의료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중국은 공공의료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았다고 할수 있다.
중앙집권적인 정치체제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는 비슷한 수준의 공공의료정책을 시행했다.
삼국시대에 약부(藥部)나 약전 등의 기관을 설치하여 의료정책을 시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의사를 일본에 파견하기까지 하였다. 고려에 이르러서는 각 군현에 약점(藥店)을 두고 의사를
 배치했다. 이때 이미 과거로 의사를 선발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독창적 의서인 동의보감의
 발간 이후로는 시골 마을마다 균일화된 의료가 보급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 때문인지 북한은 공공의료에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 그래서 1982년에는 무상의료에
 415명당 의사 한 명씩을 배치하고 의사담당제를 두어 책임지게 하였다. 당시 세계의 일부
지식인들이 북한에 대해 극찬을 한 이유 중에 공공의료의 완비가 가장 큰 이유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체제가 절정기에 이르렀을 때의 상황이다. 현재 북한의 의료상황은 절망적이다.
공공의료는 고사하고 기본적인 의료물품 마저 없어 응급처치조차 못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나 남북문제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매우 부족한 현 정권에서는 해답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다.

정창수 역사기고가
Posted by 밑빠진독